(33) 충정공(忠貞公) 정뇌경(鄭雷卿)의 충절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광주 광지리 새능 묘하-충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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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뇌경(1608~1639)의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온양이다. 1630년(인조 8)에 명나라 황태자 탄생의 경사로 인해 열린 별시(別試)에서 정뇌경 등 10인이 뽑혔는데, 시험관이던 김류와 장유는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고 매우 기뻐했다. 아버지는 정환(鄭晥)인데 공이 2살 때 별세했고, 조부는 정지겸(鄭之謙)이다. 정뇌경은 성품이 순박하고 진실하며, 도량이 넓고 재주도 뛰어났다. 유아 시절에 부친을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이모부인 기평군 유백증(杞平君 兪伯曾)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활약 정뇌경은 병자호란 때 홍문관의 교리로서 독전어사(督戰御使)가 돼 남한산성 남문과 동문에 진을 친 군
세자가 인질로 가게 되자 자원해 세자를 모시고 심양으로 갔다가 역적 정명수(鄭命壽), 김돌(金突=일명 김돌시) 등을 처치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탄로나서 처형당하게 됐다. 처형이 임박하게 이르렀을 때의 정황에 대해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別集)’의 소현세자 묘지(昭顯世子墓誌)에 “문학(文學) 정뇌경이 관소(館所)에서 사단(事端)을 일으켜 장차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하게 됐을 때 세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변호하며 구해 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며 결별을 했는데, 그 슬퍼하는 모습이 좌우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했다. 세자는 직접 오랑캐 조정에 찾아가 그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려 했는데, 문을 나서자 마자 청나라 역관(譯官)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저지하므로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정명수, 김돌 두 역관이 여러 통사(通事)와 함께 말 앞에 늘어서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 머리가 부서져야 앞으로 갈 수 있다” 했다. 사서(司書) 정지화가 나서서 세자가 용골대와 문답할 수 있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구하니 정명수가 주먹으로 정지화를 마구 때려 갓끈이 끊어지고 옷이 찢어졌다 한다. # 부역 정명수 견제하려다 32세에 오히려 죽임 당해 ‘성호사설’에는 “세자가 볼모로 잡혀가게 됐을 때 시종(侍從)들이 모두 수행하기를 회피했으나, 정뇌경 만이 홀로 수행하기를 청했다. 정명수, 김돌은 본국의 천민이었는데 건주(建州)의 전역(戰役)에 사로잡혀서 그곳의 방언(方言)을 알았던 까닭에 역관이 돼 은총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사람에게 대해 멸시하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개해 이를 갈았다. 그리고 명수가 우리나라의 방물(方物)을 훔치자 뇌경이 그들 중에서 명수를 좋아하지 않는 자를 통해 발설하고 그 사실을 증명했다가 마침내 살해를 당했다”고 했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갈 때 필선(弼善) 정뇌경은 남들이 회피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자원해 수행했고, 이때 문학 박뇌와 중국인 심가가 함께 심양에 있었는데, 정뇌경과 심가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명수를 죽이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 감을 칸(汗=청의 황제)에게 공물로 올렸는데, 모든 물건은 정명수가 관장했으므로 조선에서 공물로 바치는 물건을 사이에 몰래 도둑질해 바쳐야 할 수량보다 적게 넘겼다. 정명수 등이 관소에서 감 1천 개, 배 1천 개를 덜어내므로 세자가 말하기를 “국왕이 헌상한 물품을 어찌해 마음대로 줄이는가”하니, 두 역관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일체 내 말을 믿어야 한다. 설이 가까워지면 저절로 처치될 것이다”고 했는데, 설 하루 이틀 전에 과연 가져갔다. 정뇌경과 심가가 장차 이것을 칸(汗)에게 말해 정명수를 죽일 계획을 세웠는데, 그 때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도 이 모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박뇌가 그 사실을 정명수에게 일러바치니, 명수가 정뇌경의 관아에 찾아와 세자의 앞인데도 불구하고 공갈 협박해 비할 데 없이 모욕을 주었다. 이에 뇌경이 심한 핍박을 이겨 내지 못하고 조선에서 보내온 문서를 불살라 그의 노여움을 막았는데, 심가는 그 동안의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명수가 도둑질한 사실을 칸에게 말해 버렸다. 칸이 이를 세자궁의 벼슬아치들에게 묻자, 그들이 그 자초지종을 모두 말했는데, 박뇌가 “명수는 조금도 공물을 도둑질한 사실이 없는데 저들이 명수를 죽이려고 모의해 이런 무고(誣告)를 하게 됐다”고 하므로 칸이 크게 노해 바로 심가와 정뇌경을 죽였다. 그러자 강효원이 “나도 이 모임에 참여했으니, 의리상 나만 살아남을 수 없다”하고는 자원해 죽임을 당했다. 정명수의 악행은 이미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익히 드러났으나 호란 이후에도 악행은 그치지 않았다. 왕세자가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갈 때 하직을 고하고 떠나가니, 신하들이 길 가에서 통곡하며 전송했는데, 혹 재갈을 잡고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에 정명수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했으므로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명수는 곧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이며 청나라와의 협상에서도 청나라에 유리하게 협상을 이간질하므로 조선 정부는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각각 3천 냥의 은전을 주고, 정명수에게는 1천 냥의 은전을 주기까지 했다. # 정조가 내린 정뇌경 절개 기리는 전교 훗날 정조 23년(1799)에 왕은 정뇌경의 절개를 기리도록 전교하기를, “나는 충정공 정뇌경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에 맺혀 풀리지 않는다. 부노(?奴, 정명수 등의 역적)가 우리 임금에게 대들고 모욕하던 날을 당해 그 능욕을 받은 수치는 적들이 호통치는 것보다 백 배나 더했다. (중략) 충정공은 곧 질관(質館)의 일개 시종관으로서 그의 몸은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직무는 조정안에서 계책을 세우는 것과 관계가 없었다. 동료들과 어울려 금방 갔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벼슬과 부귀를 손쉽게 얻을 수도 있는 일인데, 가슴이 미어지는 분개를 견디다 못해 적에게 빌붙은 역적을 반드시 없애고자 죽고 사는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책을 써 적의 손을 빌어 죽이려 했으니 그 얼마나 충성스러운가. 모사가 탄로됐을 때는 한마디만 공손히 하고 빌었더라면 자기 생명을 보전하고 그 곤란을 풀 수도 있었을 것인데, 남아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죽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는 마음으로 전혀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고, 시퍼런 칼날을 받기를 마치 낙원으로 달려가듯 했으니, 그 얼마나 의로운가. (중략) 부노를 제거하면 걱정거리를 십중팔구 정도 벗어버릴 것이고 또한 우리의 힘을 기르고 적을 물리치는 계책에 안심하고 힘쓸 수 있었을 것이지만 충정공의 뜻은 성사되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었으니, 이는 운명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다”고 했다.
정뇌경이 죽은 후 조정에서는 윤집·오달제·정뇌경 등의 어미와 아내에게는 각각 쌀 12두, 콩 2두씩 주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았으며, 의정부 좌찬성 벼슬을 증직하고 정려(旌閭)했다. 정조임금은 친히 장문의 제문을 지었으니, 그 제문이 정조대왕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5권에 전해 온다. 그 중 몇 구절만 보면, “강개하고 온화한 모습(心+亢 慨雍容)/ 죽음이 홍모보다 가볍고 태산보다 무거웠네(鴻毛泰山)” “나의 심회 답답하게 맺혀(予懷輪困) 시경을 읽다가 삼량(세 사람의 현신)에 이르러 책을 덮었고(詩掩三良) 황황하게 아름다운 시호를 정하도록(煌煌美諡) 나의 태상에 명하였네(命我太常)”라 했다. 현우(賢愚) 모두 예로부터 다함께 죽었거니,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34편에서는 ‘병자호란 유적 - 광주 쌍령리 정충묘(精忠廟)와 성남 험천 전투’에 대해 소개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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