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32-천선(天仙)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성남까치 2009. 11. 17. 16:33

기호일보 -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32)

천선(天仙)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한춘섭 성남문화원장

허난설헌 묘 전경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여류시인으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이다. 본관 양천(陽川),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이다. 명종18년 강릉에서 출생하였고, 작품으로는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전해 온다. 손곡 이달(蓀谷 李達)에게 시를 배워 8살 때부터 글을 지을 정도로 재능이 빼어났다. 15세에 안동 김씨 성립(誠立)과 결혼 하였으나, 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데다 뱃속의 아이까지 잃게 되고, 동생 허균은 귀양을 가는 등 불우한 삶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에 담아 달래었으니, 섬세한 시어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실었고, 애상적인 시풍을 엮어 내었다. 난설헌이 죽은 후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 되었다. 그러나 불우한 삶은 끝내 행복으로 피어나지 못하고 27살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묘는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남편 김성립의 묘 아래에 있고. 경기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난설헌의 묘 오른편에는 어린나이에 죽은 두 자녀의 무덤이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 묘비가 세워졌으니, 비문은 국어학자 이숭녕(李崇寧)이 지었다. 난설헌 묘소의 왼쪽으로는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다.

난설헌은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살 때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으니 사람들이 여자 신동이라 하였다. 난설헌에게 시를 가르쳐 준 손곡 이달은 허씨 가문과 일찍이 친교가 있었다. 이달의 8촌인 이거(李?)는 곧 경기관찰사를 지낸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許曄)의 제자이면서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이달은 대제학을 지낸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인데, 뛰어난 문장력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아서 출세를 하지 못하였다.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선조 때의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허균과 난설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그다지 화목한 가정은 이루지 못하였고,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던 것으로 전한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는가 하면,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어서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랬으나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것이다. 그 시대에는 송시(宋詩)가 유행하였으나 난설헌의 작품은 이달의 영향을 받아 당시풍의 시가 많이 쓰여진 것 또한 불우한 삶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교사상의 한계와 잇따른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 도가풍(道家風) 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난설헌의 오라버니 허봉의 친구인 서애 유성룡의 문집에는 ‘시에 능한 여자(女子能詩)’라는 제목으로, 그 당시에 시를 잘 지은 이옥봉, 허난설헌 등을 꼽으면서 난설헌의 시 두 편을 소개하고 있다.

錦帶羅衣積淚痕(금대나의적루흔) / 비단 띠 비단 옷에 눈물 자국 뿐이니 
一年芳草怨王孫(일년방초원왕손) / 한 해 살이 꽃다운 풀 왕손을 원망함이여
瑤琴彈罷江南曲(요금탄파강남곡) / 요금으로 강남곡을 다 타니
雨打梨花晝掩門(우타이화주엄문) / 배꽃을 적시는 비 낮에 문을 걸었노라

또,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 달 비친 누에 가을 깊고 옥병은 비었는데
霜打蘆洲下暮鴻(상타노주하모홍) / 서리 친 갈대 물가에 저문 기러기 내리다 
瑤瑟一彈人不見(요금일탄인불견) / 비파 한 곡 다 타도록 사람 구경 못하는데 
藕花零落野塘中(우화영락야당중) / 연꽃은 들 연당 위에 시나브로 지누나

시를 소개한 후 유성룡은 난설헌의 시를 평하기를 “모두가 세속에서 초연히 벗어나 당시(唐詩)와 같으니 사랑할 만하다. 다른 편에도 이와 같은 시가 많다”고 하였고, 난설헌의 시집 서문을 지어 허균에게 주기까지 했는데,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다니느라 분실되었고 다시 발문(跋文)을 지은 것이 전해온다. ‘서애선생 별집(西厓先生別集)’에는 1590년 허균이 ‘난설헌고(蘭雪軒藁)’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니, 유성룡은 놀라서 “훌륭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 허씨의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라고 말하고는 이어서, “나는 시학(詩學)에 관하여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 바에 따라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아서 맑고 영롱하여 눈여겨 볼 수가 없고, 울리는 소리는 형옥(珩玉)과 황옥(璜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으며, 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다. 가을 부용은 물 위에 넘실대고 봄 구름이 허공에 아롱진다. 높은 것으로는 한(漢)나라·위(魏)나라의 제가(諸家)보다도 뛰어나고 그 나머지는 성당(盛唐)의 것만 하다. 그 사물을 보고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근심함에는 종종 열사의 기풍이 있다. 조금도 세상에 물든 자국이 없다”하였다.
심수경은 그의 문집 ‘견한잡록’에서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난설헌)는 더욱 뛰어났다. …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허난설헌의 시는 근대 규수(閨秀)들 가운데 제일위”라고 언급하였다.

난설헌의 다른 호가 경번당(景樊堂)인데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경번당에 대한 변증설’을 쓰면서, “난설헌이 경번당이라 자호한 데 대해 세상에서, 두번천(杜樊川)을 사모한 때문이라 하는데, 이 어찌 규중의 부녀로서 사모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당 나라 때에 선녀 번고(樊姑)가 있었는데 호는 운교부인(雲翹夫人)으로 한(漢)나라 때 상우령(上虞令)이었던 선군(先君) 유강(劉綱)의 아내였다. 그는 선격(仙格)이 매우 높아 여선(女仙)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름도 ‘열선전(列仙傳)’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난설헌이 바로 그를 흠모하여 경번당이라 칭한 것이다”라는 신돈복의 ‘학산한언(鶴山閑言)’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무릎을 치고 통쾌하게 여기면서 “이 어찌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 단안(斷案)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藁)’, ‘학산초담(鶴山樵談)’에는 “우리나라 아낙네로서 시 잘하는 사람이 드문 까닭은, 이른바 ‘술 빚고 밥 짓기만 일삼아야지, 그 밖에 시문을 힘써서는 안 된다’ 해서인가? 그러나 당인(唐人)의 경우는 규수로서 시로 이름난 이가 20여 인이나 되고 문헌 또한 증빙할 만하다. 요즘 와서 제법 규수 시인이 있게 되어 경번(景樊)은 천선(天仙)의 재주가 있고 옥봉(玉峯) 또한 대가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풍(文風)의 성함이 당 나라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국가의 한 성사(盛事)이다” 하였다.

난설헌의 시는 널리 유행하였는데,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는 숙종 4년에 중국에서 온 칙사가 우리나라의 문적(文籍)을 보여 달라고 하므로, 석주 권필(石洲 權?)의 문집을 비롯하여 허봉(許?), 백광훈(白光勳), 난설헌(蘭雪軒)의 문집을 제공 목록으로 기록하였다. 또 “난설헌 허씨는 규원 중에 제일이니, 중국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서 그의 문집을 사 갔다. 홍경신과 허적은 모두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는 두세 편 외에는 모두 다른 사람의 작품이다. 백옥루 상량문도 허균이 찬한 것이다’ 하였는데,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 그리고 허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는 “누님(난설헌)이 평일 꿈속에서 ‘푸른 바다는 구슬 빛 바다를 침범하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를 의지한다. 부용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가을 달빛 차갑다(碧海侵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라는 시를 지었는데, 난설헌이 세상을 뜰 적 향년이 27세였으니 ‘삼구(三九)’라는 숫자가 딱 맞은 셈이다. 그러니 명의 길고 짧은 것이 정해진 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난설헌의 작품-연꽃이미지로 처리하면 좋을 듯 합니다


채련곡(采蓮曲)

가을이라 긴 호수엔 비취옥이 흐르는데 / 秋淨長湖碧玉流
연꽃 깊숙한데 난주 매어두고 / 荷花深處係蘭舟
물건너 님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 逢郞隔水投蓮子
남의 눈에 그만 띄니 반나절이나 부끄러워라 / 剛被人知半日羞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33)-운계 정뢰경(雲溪 鄭雷卿)의 충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