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30) 실학의 중심지 옛 광주

성남까치 2009. 11. 4. 13:56

(30) 실학의 중심지 옛 광주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2009년 11월 02일 (월) 14:23:34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 실사구시의 학문 실학 발생과 발전의 중심 광주
 
조선사회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겪은 이후 정치분야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변동을 가져왔다. 대륙에서는 새로 일어난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해 대륙의 주인으로 바뀌어 가는 긴장이 조성돼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공을 생각하는 명분 때문에 대륙의 새로운 주인을 파악하는 데 때를 놓치고 말았다. 더구나 실리적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있

   
 
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하면서 명분론에 치우치게 돼 마침내 병자호란을 겪게 된 것이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고 난 조선은 서얼과 중인들의 신분상승 운동이 일어나 전통적 신분제가 일부 붕괴되고, 유랑민의 증가, 사회적 불안정과 전통적 가치관의 파괴 등 다양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나온 학문과 사상이 실학이다. 또한 실학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 그리고 개혁론을 통해 근대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실학은 유교사상의 범위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전개됐다.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에 집중돼 왔던 성리학(주자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개혁안들을 제시했던 것이다. 실학자들은 백과사전식의 ‘박학(博學)’을 추구했고, 서구에서 들어온 서학(西學, 천주학)이나 청나라의 고증학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실학은 농촌사회의 개혁을 지향했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중농학파)와 상업과 대외 무역의 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관심을 둔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북학파)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 청의 고증학을 통해 역사와 지리, 금석문의 연구에 각별한 발전을 이룬 실사구시 계열의 학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학맥의 원류는 16세기 서경덕과 조식 등 실천성을 강조한 학자들인데, 이들의 학풍이 서울·경기 지역의 북인계열 학자들(한백겸, 이수광, 허목, 윤휴)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실학의 발생과 발전의 중심지가 경기도 광주다. 이익, 정약용, 안정복, 이덕무 등 많은 실학자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인물들이 광주에서 배출됐다.

 

 

 

# 붕괴된 농촌사회의 민생안정이 시대적 배경

실학 발생의 시대적 배경은 전란 이후 붕괴된 농촌사회의 민생안정에 관한 것이었고 이익, 정약용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용후생 학파에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국학의 연구를 통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는 데에는 이수광, 이익, 안정복, 이긍익, 이중환, 정약용 등이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통해 마테오 리치의 저술인 ‘천주실의’를 소개하니,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시기의 천주교 전파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갖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렇게 광주가 실학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지리적 영향이 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광주에서 만나게 되니 한강의 수로는 운송과 교통의 요지를 형성했고, 남한산성은 국가 안전보장의 터전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이미 삼국시대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도 광주는 서울의 배후지역으로서 농산물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공급처였다. 광주는 예부터 도자기 공업이 발달해 조선 후기 수공업의 발달과 함께 도자기의 전업적 수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분원리는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하던 곳이었다.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 실학자들로 이익, 안정복, 권철신·일신 형제, 정약전·약용 형제, 이벽 등이 있다. 성호 이익은 그의 아버지 이하진이 진주목사로 있을 때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을 당해 평안도로 유배를 가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고, 안정복 역시 그의 할아버지 안서우가 1726년 울산부사에서 갑자기 물러나게 되면서 한미한 집안이 됐다. 이익은 어릴 때 안산으로 간 이후로 안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한 적이 없고, 안정복은 1736년 무주에서 광주의 텃골로 이사를 한 이후로는 역시 잠깐 관직생활을 한 것을 빼고는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 이벽의 경우는 광주가 천주교와 관련이 깊게 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깊은 사람이다.
 
   # 학문적 대성 이룬 성호 이익

 

성호 이익(1681~1763)은 태어나서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별세했고, 스승 없이 아버지가 남긴 책으로 ‘자득(自得)’해 학문적 대성을 이루었다. 이익의 학문적 자세는 “꼴 베는 아이에게도 물어야 한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 하문(下問)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익이 살았던 곳이 안산인지 광주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그의 학문적 맥락은 광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익은 청빈한 선비로서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의 아들 맹휴가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고기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이익은 “나는 집이 있고 땅이 있어 때에 맞춰 농사를 지어 굶주림과 추위에 견딜 만한데 백성들로부터 거둔 재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털끝만큼의 사치도 허용하지 않는 소신을 보여준 일화다. 이익은 40세부터 60세에 이르는 20년간의 학문 활동 성과를 모은 ‘성호사설’을 비롯한 1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고 그의 학문적 계승자로는 경전 해석분야에 윤동규와 신후담, 역사학 분야에 안정복, 인문지리학에서는 이중환, 천문학 분야는 이가환, 서학에서는 권철신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 역사학 분야에 두각 나타낸 안정복

 

순암 안정복(1712~1791)은 35세에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고, 역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59년에 ‘동사강목(東史綱目)’ 초고를 완성하고 몇 차례 수정 보완해 1778년에 완성했다. 이 저술을 통해 안정복은 당시 학자들에게 부족했던 역대 동국(東國=우리나라) 운영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다. 또 ‘임관정요(臨官政要)’가 있으니 이것은 지방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령들이 참고할 구체적인 지침서였는데, 후일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됐다. 안정복은 학파 내에서 ‘정문(頂門)의 침’이라고 불리울 만큼 후배들을 질책했다. 특히 천주교와 관련한 걱정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권철신은 “지옥이 있는 이유는 안정복 때문”이라고 극언을 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 갔다. 그러나 마침내는 천주교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기에 이르고 만다. 이익의 제자 권철신은 1801년의 천주교 박해 때 정약종, 이승훈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형 집행에 앞서 옥중에서 매질 후유증으로 순교하고 말았다.

안정복은 성호 이익이 강조했던 학문의 방법이었던 ‘이택(麗澤)’을 구현하고자 텃골에 ‘이택재(麗澤齋)’를 건립했다. ‘이택’은 주역에서 “나란히 있는 두 연못 중 한 연못의 물이 마르면 다른 연못의 물로 보충한다.”는 뜻이다. 즉 혼자서 풀지 못한 문제를 여러 사람이 함께 토론하면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다. 61살 때인 1772년에는 익위사(翊衛司)에 들어가 왕세자(정조) 교육에 참여했으니 1791년 80세에 별세했을 때 정조임금이 매우 슬퍼했다.

 
 화가 나다가도 글만 읽으면 좋고
 병이 났다가도 읽기만 하면 나아
 이것이 내 운명이라 믿고
        앞에 가득 가로 세로 쌓아 놓았네.
 -순암 안정복의 시 가운데 일부-

 

 

 

   
 
# 성호학파의 손자뻘 되는 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성호학파의 손자뻘 되는 대 학자다. 정약용이 태어난 마현마을은 그 당시는 광주군 초부면이었다. 7살 때 처음 시를 지었는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원근(遠近)이 다르기 때문이지.”란 구절이 있었다. 이를 본 부친은 아들이 장차 역법과 산수에 통달할 것이라 예견했다. 16세 때 이익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니, “꿈 속 같은 내 생각이 성호를 따라 사숙(私塾)하는 가운데 깨닫는 것이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21살 때에 세자(순조) 책봉을 기념해 실시된 증광감시(增廣監試)에 합격했다. 다른 합격자들과 함께 창덕궁에 들어가 사은(謝恩) 인사를 올리는데 정조는 특별히 정약용의 얼굴을 들게 하고 나이를 물으니, 이것이 정조와 정약용의 첫 만남이었고 이후로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꾸준히 우수한 성적을 거둔 다산에게 정조는 서적과 종이, 붓을 하사하면서 격려했다.

정약용은 국가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지었고, 살인사건을 다루는 데에 필요한 실무적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지었다. ‘목민심서’는 12편 72조로 편성됐는데, 수령으로서의 규범과 처리할 행정 업무에 대해 쓴 것이다. 정약용은 1801년 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돼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되고, 후일 귀향한 이후로도 왕성한 학문활동을 펼쳤으니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을 합해 총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수원 화성의 축조에 거중기를 만들어 공사비용을 절감했다. 1836년 결혼 60주년을 맞이했는데 4일 전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이날 사망하니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으며, 하늘의 햇빛이 얇아져 사방이 어둑어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