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실학의 중심지 옛 광주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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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사구시의 학문 실학 발생과 발전의 중심 광주
실학은 유교사상의 범위 안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전개됐다.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에 집중돼 왔던 성리학(주자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개혁안들을 제시했던 것이다. 실학자들은 백과사전식의 ‘박학(博學)’을 추구했고, 서구에서 들어온 서학(西學, 천주학)이나 청나라의 고증학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실학은 농촌사회의 개혁을 지향했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중농학파)와 상업과 대외 무역의 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관심을 둔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북학파)로 나눌 수 있고, 여기에 청의 고증학을 통해 역사와 지리, 금석문의 연구에 각별한 발전을 이룬 실사구시 계열의 학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학맥의 원류는 16세기 서경덕과 조식 등 실천성을 강조한 학자들인데, 이들의 학풍이 서울·경기 지역의 북인계열 학자들(한백겸, 이수광, 허목, 윤휴)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실학의 발생과 발전의 중심지가 경기도 광주다. 이익, 정약용, 안정복, 이덕무 등 많은 실학자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인물들이 광주에서 배출됐다.
# 붕괴된 농촌사회의 민생안정이 시대적 배경 실학 발생의 시대적 배경은 전란 이후 붕괴된 농촌사회의 민생안정에 관한 것이었고 이익, 정약용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용후생 학파에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국학의 연구를 통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하는 데에는 이수광, 이익, 안정복, 이긍익, 이중환, 정약용 등이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통해 마테오 리치의 저술인 ‘천주실의’를 소개하니,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시기의 천주교 전파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갖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태어나서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별세했고, 스승 없이 아버지가 남긴 책으로 ‘자득(自得)’해 학문적 대성을 이루었다. 이익의 학문적 자세는 “꼴 베는 아이에게도 물어야 한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 하문(下問)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익이 살았던 곳이 안산인지 광주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그의 학문적 맥락은 광주로 이어져 내려왔다. 이익은 청빈한 선비로서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의 아들 맹휴가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고기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이익은 “나는 집이 있고 땅이 있어 때에 맞춰 농사를 지어 굶주림과 추위에 견딜 만한데 백성들로부터 거둔 재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털끝만큼의 사치도 허용하지 않는 소신을 보여준 일화다. 이익은 40세부터 60세에 이르는 20년간의 학문 활동 성과를 모은 ‘성호사설’을 비롯한 1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고 그의 학문적 계승자로는 경전 해석분야에 윤동규와 신후담, 역사학 분야에 안정복, 인문지리학에서는 이중환, 천문학 분야는 이가환, 서학에서는 권철신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 역사학 분야에 두각 나타낸 안정복
순암 안정복(1712~1791)은 35세에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고, 역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59년에 ‘동사강목(東史綱目)’ 초고를 완성하고 몇 차례 수정 보완해 1778년에 완성했다. 이 저술을 통해 안정복은 당시 학자들에게 부족했던 역대 동국(東國=우리나라) 운영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다. 또 ‘임관정요(臨官政要)’가 있으니 이것은 지방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령들이 참고할 구체적인 지침서였는데, 후일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됐다. 안정복은 학파 내에서 ‘정문(頂門)의 침’이라고 불리울 만큼 후배들을 질책했다. 특히 천주교와 관련한 걱정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권철신은 “지옥이 있는 이유는 안정복 때문”이라고 극언을 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 갔다. 그러나 마침내는 천주교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기에 이르고 만다. 이익의 제자 권철신은 1801년의 천주교 박해 때 정약종, 이승훈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고 형 집행에 앞서 옥중에서 매질 후유증으로 순교하고 말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성호학파의 손자뻘 되는 대 학자다. 정약용이 태어난 마현마을은 그 당시는 광주군 초부면이었다. 7살 때 처음 시를 지었는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원근(遠近)이 다르기 때문이지.”란 구절이 있었다. 이를 본 부친은 아들이 장차 역법과 산수에 통달할 것이라 예견했다. 16세 때 이익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니, “꿈 속 같은 내 생각이 성호를 따라 사숙(私塾)하는 가운데 깨닫는 것이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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