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글 창제와 태허정 최항(太虛亭 崔恒) 선생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최항선생은 지난 2004년 당시 문화관광부로부터 10월의 인물로 선정됐다. 오른쪽은 최항선행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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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위 글은 널리 알려진 대로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나라 글자 반포의 취지를 나타낸 글이다. 훈민정음 창제에 동참한 최항 선생
처음 ‘훈민정음’이라고 불려 진 한글은 세종대왕의 강력한 추진으로 8명(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의 학자들이 참여해 완성됐으며, 이에 대한 해설을 책자로 발행했으니, ‘세종실록’ 28년(1446) 9월 기록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룩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고 했고,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 끝에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上澣)이라 기록돼 있어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효행이 남다른 선비로 40년간 조정에 머물러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최항 선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세종이 장차 과거를 보이려 할 때에 꿈에 용 한 마리가 성균관 서편 정자 잣나무를 감고 있는 것을 보고 깨어서 이상히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가만히 가 보게 하니 한 선비가 행탁(行?)을 베고 잣나무 아래에 누웠는데 잣나무에다 발을 걸치고 자고 있었다. 과거가 발표됨에 공이 장원에 올랐는데, 관노가 그의 얼굴을 보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했다.
선생은 도덕이 높고 박학다식하며, 천품(天稟)이 어질고 겸손해 항상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으며, 언제나 신중해 삼사일언(三思一言)과 삼사일행(三思一行)을 실천했다. 평상시에 비록 한겨울과 한여름에도 의관을 바로 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나태한 모습이 없었으며 항상 빠른 말투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으니 천성이 그러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에 탐닉했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났다. 또한 선생은 효행 역시 남다른 선비였으니, 세조 4년(1458)에 부친상을 당해 시묘살이 중에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459년 4월 세조가 마침 ‘경국대전’을 편찬 중이었으므로 기복(起復 : 관직에 복귀)을 명했으나, 그 명령이 자식 된 도리는 물론 조정의 기강에도 벗어나는 일로 옳지 못하므로 응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글을 3회에 걸쳐 왕에게 상서한 내용, 즉 ‘기복불응상서문(起復不應上書文)’이 세조실록에 실려 있다. 세조가 답하기를, “경의 재능은 나만 아는 바이니 일신만을 위할 수 없으리라.”하자, 그는 부득이 명에 응했다. 훗날 정조 임금도 높게 평가 ‘청장관전서’에 “부인으로서 풍수지리에 밝았던 사람으로, 중국에는 곽경순(郭景純)의 딸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태허정 최항의 부인 서 씨가 있다. 서 씨는 바로 목사(牧使) 서미성(徐彌姓)의 딸이요,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누이다.”라고 했으니, 현재 서 씨 부인의 묘소는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최항 선행 묘소 인근에 있어 풍수가들이 명당자리라고 일컫고 있다.
또한 해마다 한글날에는 선생의 묘소에서 추모제향을 받들고 있다. 10월 9일 한글날은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해 법정 공휴일로 정했다. 그러나 1990년 법정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로 바뀌었고, 2006년부터 법정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 지정됐다.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와 혼도 사라지게 되는데, 일제 치하에서 창씨 개명과 한글 말살에 맞서 싸우면서 지켜낸 말과 글을 우리는 더욱 다듬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9편에서는 ‘광주의 민속놀이-광지원 해동화 놀이와 농악’에 대해 소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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