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28) 한글 창제와 태허정 최항(太虛亭 崔恒) 선생

성남까치 2009. 10. 20. 16:53

(28) 한글 창제와 태허정 최항(太虛亭 崔恒) 선생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최항선생은 지난 2004년 당시 문화관광부로부터 10월의 인물로 선정됐다. 오른쪽은 최항선행 친필

 

 

2009년 10월 19일 (월) 15:24:18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위 글은 널리 알려진 대로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세종대왕이 백성들에게 나라 글자 반포의 취지를 나타낸 글이다.

문자는 인류의 역사를 문자로 기록하게 된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우리 겨레의 문자 생활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자(한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둘은 한자를 수용하되 변용해 사용한 것이고, 마지막은 우리의 고유한 새로운 문자를 창제해 사용한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한자를 빌려서 사용하되, 그 한자가 가지고 있는 발음과 의미 기능 중 어느 한 쪽만을 택해 사용했다. 즉, 하나의 방법은 우리말의 발음 ‘고’를 표기하기 위해 한자 ‘古’를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古’의 의미적 기능을 버리고, 한자의 문자 형태와 발음을 빌려 우리 말을 표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어의 형태소 ‘물’을 표기하기 위해 한자 ‘水’를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자 ‘水’의 음은 고려하지 않고, 한자의 문자 형태와 그 문자의 의미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이다. 한글 창제는 한민족 역사에 가장 빛나는 사적(史蹟)이라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동참한 최항 선생

   
 

처음 ‘훈민정음’이라고 불려 진 한글은 세종대왕의 강력한 추진으로 8명(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의 학자들이 참여해 완성됐으며, 이에 대한 해설을 책자로 발행했으니, ‘세종실록’ 28년(1446) 9월 기록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룩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고 했고,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문 끝에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上澣)이라 기록돼 있어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1443년 겨울에 세종에 의해 창제됐고, “하늘·땅·사람이라는 삼극의 뜻과 음·양이라는 이기의 묘함이 다 포괄되지 않음이 없다(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고 했다. 또한 28자가 아주 교묘해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는 깨우칠 수 있다고 했다.

 


정인지가 쓴 서문에 훈민정음은 ▶한문을 풀이해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송사(訟事)를 들어 그 사정을 알 수 있으며 ▶자운(字韻)의 경우 청탁을 잘 구분할 수 있고 ▶악가(樂歌)의 경우 율려(律呂)를 극히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등의 우수성이 있다고 하면서,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다고 했다.


바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사 8명 중 그 한 학자로 최항 선생이 참여했다. 최항(1409~1474) 선생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 정보(貞父). 호 태허정·동량(山+童 梁). 시호는 문정(文靖)이니, ‘도덕이 높고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조선 초기 대학자로서 역사, 언어 등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나 중국에 보내는 사신의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도맡아 썼다. 1434년(세종16)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해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됐고,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1461년에는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국역 간행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 조선 초기의 법률제도를 집대성했다. 문집에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등이 있다. 한글의 창제에 관해서는 세종대왕의 특지(特旨)까지 받아 그 수석연구관으로서 집현전 8학사들과 더불어 불철주야로 노심초사하며 주도적으로 연구한 결과, 1443년에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하고 3년 후인 세종 28년에 반포하게 된 것이다.

    효행이 남다른 선비로 40년간 조정에 머물러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최항 선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세종이 장차 과거를 보이려 할 때에 꿈에 용 한 마리가 성균관 서편 정자 잣나무를 감고 있는 것을 보고 깨어서 이상히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가만히 가 보게 하니 한 선비가 행탁(行?)을 베고 잣나무 아래에 누웠는데 잣나무에다 발을 걸치고 자고 있었다. 과거가 발표됨에 공이 장원에 올랐는데, 관노가 그의 얼굴을 보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했다.

   
 

선생은 도덕이 높고 박학다식하며, 천품(天稟)이 어질고 겸손해 항상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으며, 언제나 신중해 삼사일언(三思一言)과 삼사일행(三思一行)을 실천했다. 평상시에 비록 한겨울과 한여름에도 의관을 바로 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나태한 모습이 없었으며 항상 빠른 말투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으니 천성이 그러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에 탐닉했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났다. 또한 선생은 효행 역시 남다른 선비였으니, 세조 4년(1458)에 부친상을 당해 시묘살이 중에 있었는데, 그 다음해인 1459년 4월 세조가 마침 ‘경국대전’을 편찬 중이었으므로 기복(起復 : 관직에 복귀)을 명했으나, 그 명령이 자식 된 도리는 물론 조정의 기강에도 벗어나는 일로 옳지 못하므로 응할 수 없다는 진심어린 글을 3회에 걸쳐 왕에게 상서한 내용, 즉 ‘기복불응상서문(起復不應上書文)’이 세조실록에 실려 있다. 세조가 답하기를, “경의 재능은 나만 아는 바이니 일신만을 위할 수 없으리라.”하자, 그는 부득이 명에 응했다.

성품이 겸손하고 간정하며 단정 개결해 부화함이 없어 겉을 꾸미지도 않으며 평탄하게 처세해 남보다 다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문장이 웅장 호방하고 풍부했으며 세련된 문장 실력으로 외교관련 문서는 모두 공의 손으로 이루어지니 중국 사람들이 매양 칭찬을 했다.

최항 선생은 여러 분야에서 박학다식해 막힘이 없었으니, 세조는 일찍이 동방의 학자들이 한자에 대한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대문을 띄어 읽는 법도 명확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노숙한 신하와 학식 많은 선비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나누어 주고, 옛 것을 상고하고 이제 것을 참고해 토를 정하게 하고, 또 문유(文儒)를 모아 틀린 것을 강론하게 해 왕이 스스로 결단을 내렸는데, 최항은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터럭과 실낱처럼 분석해 왕의 물음에 응대함이 메아리 같았으니, 임금이 재미있게 듣고 싫어하지 아니하고 좌우 사람들에게 “영성군(寧城君)은 참으로 천재다.”라고 했다.

두 차례나 정승이 돼 관대한 정사를 베푸는 데 힘쓰고 제도를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를 결정할 때에는 확고해 범하지 못했다. 조정에 들어선 지 40년에 한 번도 탄핵을 당한 적이 없었으며, 벼슬이 정승에 오르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외직에 있어 보지 않았다. 성종 임금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극진하게 공경했는데, 어느 날 출근하려던 중 별안간 병이 나므로 임금이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했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으니 선생의 나이 66세였다.

  훗날 정조 임금도 높게 평가

‘청장관전서’에 “부인으로서 풍수지리에 밝았던 사람으로, 중국에는 곽경순(郭景純)의 딸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태허정 최항의 부인 서 씨가 있다. 서 씨는 바로 목사(牧使) 서미성(徐彌姓)의 딸이요,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누이다.”라고 했으니, 현재 서 씨 부인의 묘소는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최항 선행 묘소 인근에 있어 풍수가들이 명당자리라고 일컫고 있다.

최항 선생은 훗날 정조 임금도 높이 평가했다. 정조 임금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61권 ‘일득록(日得錄)’에 “태허정 최항은 국운이 왕성한 때를 만나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일개 문인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남긴 문집을 보면 기상이 매우 웅장하니 국가 초기의 원기(元氣)가 왕성하였음을 오히려 상상할 만하다. 다만, 몇 편밖에 남지 않아 거장의 솜씨를 충분히 다 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라고 했다.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됐고, 2004년 10월에는 문화관

   
 
광부에서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해 광주문화원(원장 이상복)과 태허정 최항 선생 기념 사업회(회장 박광운)에서 학술심포지움과 한글사랑 백일장, 한글 자체(字體) 전시회 등을 개최했다.
또한 해마다 한글날에는 선생의 묘소에서 추모제향을 받들고 있다. 10월 9일 한글날은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해 법정 공휴일로 정했다. 그러나 1990년 법정 공휴일이 아닌 ‘기념일’로 바뀌었고, 2006년부터 법정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 지정됐다.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역사와 혼도 사라지게 되는데, 일제 치하에서 창씨 개명과 한글 말살에 맞서 싸우면서 지켜낸 말과 글을 우리는 더욱 다듬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9편에서는 ‘광주의 민속놀이-광지원 해동화 놀이와 농악’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