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25) 천주교 박해와 남한산성

성남까치 2009. 9. 29. 16:51

(25) 천주교 박해와 남한산성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가톨릭(catholic)이란 ‘보편적’이란 뜻의 그리스어 katholikos에서 나온 말로 2세기경부터 교회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돼 왔다. 그 후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분리돼 나가자 그를 신교라 하고 가톨릭을 구교라 부르게 됐으니, 오늘날 천주교는 그 때의 구교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가톨릭은 외부로부터의 선교 이전에 우리 스스로에 의해 신앙을 싹 틔웠다.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일 때는 외부 성직자의 가르침을 받은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초기의 신자들이 서적을 통해 가톨릭(당시는 천주학, 또는 서학이라고 함) 교리를 스스로 탐구하며 익히고 실천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특이한 현상이었다.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면서 전통적 사상과 질서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때마침 서양으로부터 천주학 사상이 도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학은 전통적 가치관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어 박해를 받게 됐고, 그 중에 남한산성은 천주교의 순교성지로서의 역사를 추가하게 됐다.

 

 

 # 천진암 시대 개막과 한국 가톨릭 박해

   

처음 천주교인들이 교리를 학습한 종교서들은 마테오 릿치 신부의 ‘천주실의’나 판토하 신부의 ‘칠극’과 같은 것이었는데,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 편에 받아 온 것이었다.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초창기 교리연구에 참여한 이들은 권철신, 권일신 형제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이었다. 이

=김성우 성인 동상

 

 

들은 앵자산 주어사(走魚寺)에서 연구 모임을 가졌고, 1779(정조 3)년 퇴촌면 천진암(天眞菴) 불교 사찰에서 천주교 강학회를 열었다. 강학회는 남인 학자 이벽이 참가하면서 활기를 띠어 가톨릭 신앙의 수용단계를 앞당기게 됐다. 초기의 신앙인들은 천주교를 단순한 피안의 믿음으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집안을 바로 잡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원리로부터 세계 평화까지도 가톨릭 교리에서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승훈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영세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은 후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영세를 주는 방식으로 신자 수를 늘려 갔다. 결국 천진암 강학회는 서학(西學)을 서교(西敎)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시킨 일대 계기가 됐다. 이러한 천진암 시대는 1784년 막을 내리고, 곧 이어 서울의 수표동 명례방(이벽의 집)으로 옮겨 조선 교회 창설의 본격적인 채비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한국의 가톨릭 박해는 처음부터 처참했다. 전통적 사상과 윤리로 볼 때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시지 않는 천주교는 조선 사회에 수용될 수 없는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있었는데, 그 중 남한산성 주변 지역에서의 박해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교인들을 사학(邪學) 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李家煥)이었다. 이가환은 실학자 성호 이익의 종손이며, 이승훈의 숙부로서,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는데,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해 일식과 월식 그리고 황도와 적도의 교차 각도를 계산하고, 지구의 둘레와 지름에 대한 계산을 도설로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 자신이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고 자신할 정도였고, 정약용이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천재였다.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돼 천주교인이 됐다. 이벽에게서 서학 입문서와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는 한편, 제자들에게 열렬히 전교하는 신자가 됐으며,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돼 순교했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5) 광주부윤으로 임명돼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 널리 사학을 금지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해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 남한산성 주변지역 가톨릭 박해 극심

남한산성은 신유박해(1801년) 때에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토마스 한덕운(韓德運)이 체포돼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잊을 수 없는 순교지가 됐다. 그리고 기해박해(1839년)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하남 구산마을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胄集)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됐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金聖熙), 김차희(金次熙), 김경희(金敬熙), 김윤희(金允熙), 최지현(崔址鉉), 심칠여(沁七汝)와 서문 밖의 홍희만(洪喜萬), 홍학주(洪鶴周) 등 40여 명이 순교했다.

▶신유박해=신유박해(1801년)에서는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강완숙 등 여주, 양평, 광주 일대에서 상당수가 검거되고, 남한산성에서는 300여 명이 순교했다. 남한산성에서의 순교자로는 박중환, 한덕운, 한덕원 형제와 임희영, 정종호, 이중배, 정순매, 최창주 등의 이름이 전해온다. 한덕원은 모진 고문에도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말하기를 “제가 이름을 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겠다면 서슴지 않고 대겠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잡아다가 목을 졸라 숨이 막힐 지경으로 만들고 잡혀오는 족족 목을 벨 것이니 아무도 밀고할 수 없다.”했는데 참수를 당함에 이르러서도 목을 베는 나무토막을 붙들고 망나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칼에 목을 베어 주오.” 하니 망나니는 겁이 나서 벌벌 떨며 헛 칼질을 하며 세 번 만에야 목이 떨어졌으니 1802년 2월 2일의 일이다.

▶기해박해=기해박해(1839년 때에는 앵베르 모방과 샤스탕을 군문효수(軍門梟首)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등이 참형에 처해 졌으니, ‘헌종실록’에 따르면, 배교(背敎)해 석방된 자가 48명, 옥사한 자 1명, 사형된 자가 118명 등이었다. 그러나 현석문(玄錫文)이 쓴 ‘기해일기’에는, 참수된 자가 54명, 교수형 장하(杖下)에 죽은 자와 병사한 자가 6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때 하남지역 구산(龜山) 마을

=남한산성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 

에서 다수의 순교자가 있었다. 성 김성우(안토니오, 1795~1841)는 하남시 망월리의 구산 마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구산마을은 경주 김씨의 집성촌으로 그를 포함한 삼형제가 모두 천주교인이 돼 구산 마을 전체가 교우촌으로 변모했다. 김성우의 이름은 우집(禹集), 자는 치윤(致允)이다. 함께 순교한 형제 문집(윤심)은 셋째이고, 둘째가 만집(덕심)이다. 1833년 중국인 신부 유방제(劉方濟)가 입국하자, 서울 느리골(於義洞:현 효제동)로 이주해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다시 동대문 밖 마장안(馬場內:현 마장동)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그 후 구산마을 자신의 집에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이후에는 모방(Maubant) 신부를 그곳에 거처하도록 하기도 했다. 1839년 그의 동생 만집이 체포됐으나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밀고에 의해 그의 동생들과 사촌 김주집이 체포돼 남한산성에 투옥됐다. 이때 이들은 옥중에서도 교리를 전파하다가 1841년 2월 둘째가 먼저 옥중 병사하고, 셋째와 사촌은 그 후로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옥중에서 죽었다. 처음에 김성우는 지방으로 피신했으나 수색에 걸려 1840년 1월경 가족들과 함께 체포됐다. 체포된 후에도 그는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의연하게 행동했고,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파해 그 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841년 4월 곤장 60대를 맞고도 배교를 하지 않자, 다음 날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등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됐으며, 시복(諡福) 후 발굴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됐다. 1925년 7월 5일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한국 가톨릭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성인과 함께 시성됐다. 순교하기 전 그가 남긴 말은 천주교인으로서 반석처럼 굳은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다.”

=하남 소재 구산성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2천여 명이 순교했고 그 후로 10여 년 사이에 또 8천여 명이 순교했는데, 이처럼 여러 차례의 박해 때 광주 일대에서도 상당수의 순교자가 발생했였을 것이나 구체적인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음으로 해 그 전모를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성남시 운중동, 사기막골, 동원동의 동막골, 광주 오포면 신현리의 등점골, 도척면 유정리, 천진암, 하남의 구산마을 등에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서 들어와 정착한 마을 이름 유래가 그 당시의 정황을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다. 1919년 3월에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을 뒤덮을 때 구산마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의 지도자였던 김교영은 곧 구산마을 천주교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굳은 신앙과도 같이 나라 사랑의 정신을 실천했던 것이다.

 

 

1997년 내가 지은 시, <별빛이여>로 순교한 믿음의 선각자들의 영혼을 위로해 본다.

 
  거룩한 이야기로 / 솔향기 풍겨 오고 /
  이 땅 위 지켜 주던 / 빛이여 별빛이여 /
  새하얀 순교 성자들 / 노래하며 따르리라

 

 

※ 천주교 박해 때 행해진 형벌 = 목을 베는 참수형(斬首刑),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형(絞首刑), 곤장을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 등이 있었는데, 병인박해 때는 워낙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형을 집행하는 포졸들 마저 피를 보는 데 진저리를 내고 법전에도 없는 백지사(白紙死)라는 것을 고안해냈으니, 사지를 묶고 물을 뿌린 한지를 여러 겹 얼굴에 덮어 질식사시키는 것이었다.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6편은 ‘하남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이야기’편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