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23)하남 이성산성(二聖山城) - 국가사적 제422호

성남까치 2009. 9. 15. 13:16

(23)하남 이성산성(二聖山城) - 국가사적 제422호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장방형 건물지 복원도 

 

이성산성(二聖山城)은 하남시 춘궁동과 초일동, 광암동의 분기점에 자리한 이성산(해발 209.8m)의 정상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우리나라 고대사의 수수께끼와 근세사의 흥망성쇠 역사를 모두 품고 있다.

   
 


총 둘레는 1천665m의 규모인데, 성벽의 높이는 평균 5~7m 정도이고, 성 내부 면적은 약 3만9천 평에 달한다. 입지(立地)나 쌓는 방법이 매우 정교하고, 성 돌을 옥수수알 모양으로 둥글게 다듬어서 미술적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주변이 한눈에 보이고, 가까이에는 평야가 있으며, 아차산성을 비롯한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점에 있다.
이성산성의 주변 5km 반경의 거리에 서쪽으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 특징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이성산성과 춘궁동을 백제의 도읍지로 보는 근거가 됐다.

 

 

 

 

 

 

 

 

 

 # 백제 근초고왕 때 도읍지 ‘남한성’은 이성산성

 

한성시대의 백제 도성은 ‘하남위례성’으로 불려지지만, 몇 차례 도읍을 옮긴 사실에 대한 문헌기록

     =이성산성 9각 건물지 복원도

들이 매우 단편적이기 때문에 명확한 위치를 알려 주지는 못 한다. ‘삼국사기’에 온조왕 13년 한산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고 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온조왕이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13년에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기름지고 걸으니, 마땅히 여기에 도읍을 세워서 장구한 계교를 도모하고자 하노라.”하고, 드디어 한산 아래에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 궁궐을 짓고, 14년 정월에 도읍을 옮겨 남한성(南漢城)이라 했다고 기록이 전한다. 그 후 376년을 지나 근초고왕 24년에 도읍을 남평양에 옮겨 북한성(北漢城)이라 했고, 백제가 망하고 신라 문무왕 3년에 한산주로 고치고, 8년에 남한산주로 했다가, 경덕왕 15년에 한주로 고쳤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일본 기쿠치성의 8각 건물

 목간(木簡) 중에는 ‘남한성(南漢城)’이라 쓰여진 것이 확인돼 이성산성이 ‘세종실록’에서 언급한 ‘남한성’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두 토성에서는 다량의 백제시대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도성으로서의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몽촌토성에 伯濟라는 선주민 세력이 있었고, 온조를 비롯한 고구려계 이주민들에 의해 새로운 百濟가 건국되면서 풍납토성이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강이 정비되기 이전, 해마다 장마철이면 강남 일대가 상습적으로 침수됐던 것을 기억하는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이 일대가 국왕이 상주하는 도성으로서의 입지조건이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구수왕(仇首王) 8년 8월에 한수 서족에서 군사를 대열(大閱), 고이왕 7년 7월 석천(石川)에서 군사를 대열, 근초고왕 24년 11월에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대열했는데, 기치는 모두 황색을 사용했다든지, 아신왕 6년 7월에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대열했던 것처럼 군사적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고, 한강의 배를 이용한 물자 수송 등으로 볼 때 교통의 요지로서 번성했을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조선시대 역시 한강 남쪽 일대를 강무장으로 사용한 기록이 수없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 이성산성은 통일신라시대 때 축조?

이성산성은 1986년부터 한양대 박물관에 의해 10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은 대체로 신라 토기와 경질의 기와가 대부분으로 밝혀졌다. 아직 발굴이 완료된 것은 아니어서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이 통일신라시대에 집중되고 있어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할 때 이 신주의 주성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

   
      =옥수수알 보양으로 다듬은 성돌


이성산성은 장방형의 성돌로 1차 성벽을 쌓았고, 그 바깥 면에 다시 2차로 쌓았는데 다른 어느 성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옥수수알 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성산성 발굴 초기부터 관여하면서 연구해 온 토지박물관의 심광주 박사는 이성산성의 전체 성 돌의 무게를 10t 트럭 1만8천여 대 분량인 18만1천818t으로 추산하고, 전체 성 돌의 개수를 268만5천312개로 계산했다. 또한 성벽의 외면에 사용된 다듬어진 성 돌은 18만6천480개로 계산했으며,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쌓는 데에는 연인원 64만3천566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이들 인부들에게 하루 600g의 식량을 준다고 했을 때 80kg들이 가마로 4천827가마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쌀이 소모된 것으로 파악했다.
성문은 다락문이라고도 하는 현문식(懸門式)으로 축조됐고, 성 안에는 80평이 넘는 대형 장방형 건물 4곳을 포함해 8각 건물지 1개소, 9각 건물지 2개소, 12각 건물지 1개소 등 20여 개에 달하는 대규모 건물지가 드러났다. 그 중 동서로 대칭을 이루는 9각 건물과 8각 건물은 각각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과 토지신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산성은 적과 대치하면서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하는데, 군사 또는 백성들의 식수해결을 위해 돌로 쌓아 만든 네모난 형태의 저수지가 조성됐고, 쇠나 흙으로 만든 말을 부러뜨려 묻어놓은 신앙유적도 조사됐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철제도끼와 쇠스랑, 무진년(戊辰年)명 묵서 목간, 짚신, 목제인형, 팽이, 요고(腰鼓), 40여 점의 벼루가 출토돼 당시의 문화생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근거한다면 이성산성의 주된 사용 시기는 6세기 중반에서 8세기까지이며 9세기 중엽에 폐기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 문헌기록에 찾기 어려운 이성산성

   
                =삼국시대 숫막새기와
이성산성을 문헌기록에서 찾기는 어렵다. 태종 임금이 16년(1416) 10월 7일에 ‘상왕을 모시고 광주(廣州) 위요성(慰要城)에서 사냥하고, 수릉을 돌아본 후 다음날에 환궁하였다.’고 한 것과, 바로 이듬해 9월 3일 ‘임금이 상왕을 받들고 광나루(廣津)를 건너 위요성(慰要城)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저녁에 석도(石島)에 머물러 잤다.’고 한 것으로 볼 때, 광나루 건너에 있다고 한 위요성이 이성산성이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확실한 문헌 기록으로 1846년(헌종 12)에 편찬된 홍경모의 ‘중정 남한지’를 참조할 수 있는데, ‘이성산은 금암산 북쪽에 있으며, 온조의 성지(城址)가 있다.’ 했고, ‘위례는 당시의 방언인데, 무릇 성곽으로 사방을 에워싸는 것을 일컬어 위리(圍?)라고 하며, 위리는 위례와 서로 비슷하다. 목책을 심고 흙을 쌓아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위례라고 부른 것’이라고 했다. 홍경모는 남한산성이 온조의 옛 도읍이었다고 하는 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면서, 현재의 하남시 고골 일대와 궁촌, 이성산성을 온조의 성터라고 보았다. 또한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 있으면서 하남위례성은 따로 있는 이경(二京) 체제였다고 하면서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광주 고읍의 궁촌(宮村)으로 여기에 사는 백성들이 참외를 심어서 생업으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성산성과 매우 흡사한 성이 일본에 있으니 구마모토현의 기쿠치(鞠智)성이 그것이다. 1967년부터 72동의 건물터가 발견됐고, 건물 복원에는 모두 구마모토현에서 생산된 재료들만을 사용했다. 팔각형 건물은 일본 내 고대 산성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것이고 한국에서는 이성산성이 유일하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이곳에서 7세기 후반 백제에서 만들어진 길이 12.7㎝, 폭 3㎝의 청동제 보살입상이 1.5m 땅속에서 발굴됐다. 일본에서 백제의 청동 불상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라고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기쿠치성은 663년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 백제에서 건너온 귀족의 기술 지도로 축성된 것으로 ‘일본서기’에 적혀 있어 정설로 인정됐지만, 그 동안 입증할 만한 유물은 없었는데, 구마모토현 교육위는 “보살상 발견으로 축성에 백제 기술이 이용된 사실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 이성산성 입구에 스러진 민씨 문중 흔적

   
   =사람얼굴 나무조각

구한말 민씨 문중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을 무렵, 이성산성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금암산 주변은 민씨의 소유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인조 때(1644) 광주목사를 지낸 민응협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고, 천일은행(상업은행-우리은행에 합병)과 휘문고교의 설립자인 민영휘가 출생한 곳이 바로 이성산성으로 올라가는 입구 부근이다.
민영휘의 호는 하정(荷汀)인데, 김옥균 등의 갑신정변(1884)을 진압하고 10년 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군(淸軍)에게 지원을 요청, 그 진압에 힘썼다. 임오군란 때 탐관오리로 논죄돼 임자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의 자작(子爵)이 됐다. 한편, 이성산성으로 오르는 입구 오른편에는 선산동 주민들이 세운 승선 민광식 자혜비가 조그맣게 서 있고, 인접한 민영휘의 생가 터에는 현재까지도 ‘荷汀閔柱國降生遺墟紀念碑’라 새겨진 비석이 쓰러진 채 낙엽에 덮여 가고 있어서 권력과 부귀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4편에서는 ‘교육의 요람, 광주향교(廣州鄕校)’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