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22) 독립운동의 성지, 남한산성

성남까치 2009. 9. 8. 15:03

(22) 독립운동의 성지, 남한산성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한백봉 의사가 물산장려운동 당시 만들었던 멜빵 

2009년 09월 07일 (월) 15:27:01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 남상목의병장의 별세를 의병부대에

   알린 통고문

   
 

 남한산성의 푸른 소나무 숲에는 외세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호국의 정기가 서릿발처럼 스며 있고, 암울한 주권 상실의 시대에서 빛을 회복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독립 운동의 역사 또한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의병항쟁의 중심지였으며, 만세운동과 그 이후 신간회 활동, 금림조합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 등을 통해 그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곧 남한산성은 인근 지역의 독립항쟁을 포괄하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나라 사랑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 의병 항전의 중심지

의병이란 국가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가 적과 싸우는 민중 의용병을 말한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정수(精粹)’라고 했다. 남한산성은 곧 의병 항전의 중심지였다.

을미의병(1895~1896)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의 지령을 받은 일단의 낭인(浪人)들이 명성황후를 소살(燒殺)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심진원(혹은 심영택) 의진을 비롯한 연합의진이 구성돼 의병운동사상 처음으로 서울진공작전을 계획, 실행하고 자진해산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항전했다는 점에서 독립투쟁사에 길이 남을 의거로 평가된다.

김하락, 조성학,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이 중심이 돼 이천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火砲軍 都領將 方春植)과 함께 포군 100명을 선발하는 등 단기간 동안 각지에서 최소한 900명이 모집돼 이천에서 결성된 ‘이천 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는 1896년 1월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을 백현(魄峴 : 광주~이천 사이에 있는 고개이름, 넋고개)에서 섬멸시키는 쾌거를 올렸고, 2월 28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심진원의 의병과 연합하게 됐다.

여기에는 광주, 이천 외에 양근(양평) 의진도 합세해 ‘동경조일신문’에는 남한산성 연합의진이 1천6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남한산성 의진은 3단계의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키고자 했는데, 이 작전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실패했다. 그러나 이곳에 주둔했던 의병들은 양근 및 양지 방면으로 이동해 이후 안동지방을 거쳐 1896년 6월에는 경주성을 점령하는 등 끝까지 항쟁을 계속했는데 이들의 창의대장은 김하락이었고 중군은 광주의 안시흥(安時興)이었다.

을사의병(1905~1907)은 남한산성 주변에서 1905년 6월에 약 200명으로 편성된 의병이 부민(富民)들의 재물을 군자금으로 확보하고 총기를 수집해 갔고, 광주의 구만서라는 사람이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평역의 일진회원을 처단했다. 1905년 11월 19일 이등박문이 각 대신을 위협해 5개 조의 을사조약을 늑결(勒結)함으로써 의병전쟁은 더욱 확산돼 갔다.

 # 정미의병과 남상목 의병장

정미의병(1907~1910)은 성남지역 출신 의병장들이 활약한 시기였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4일 전문 7조로 된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바, 조선의 군사권·재판권·징세권이 박탈되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1907년 8월 1일에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광주의 화약고 2곳과 무기고 4곳을 폭파시켰다. 대량의 무기와 화약이 저장돼 있던 남한산성의 화약고는 의병에게 넘어갈 경우 일본군에게 치명적이었으므로 일본군은 황급히 폭파하고 말았는데, 이때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한다. 이 시기에 성남 출신의 남상목 의병장은 구식총 40자루와 신식총 10여 자루로 무장하고 전투를 별였으며, 윤치장 의병장도 광주 묵동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양주일대에서 활약했다. 남상목 휘하에서 좌익군장으로 활약한 김재선은 시위대의 퇴역병 출신으로서 전문적 군사지식을 의병 작전에 적극 활용했다. 남상목은 안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으나, 무기 부족 등 전투력의 한계를 느껴 이에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잠시 집으로 가던 중 밀고자에 의해 체포됐고, 고문을 받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에 장 파열로 순국했다. 남상목 의병장의 애국충정은 마침내 남기형 후손과 성남문화원의 향토사 정립 노력이 모아져, 2007년 5월 28일 기념사업회가 창립되고 성남문화원의 청원으로 2008년에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돼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 들불처럼 번진 독립만세 운동

1919년 2월에 고종 황제의 흉서(凶逝) 소식이 전해지자 국장(國葬) 문상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한백봉, 한순회 등의 주도하에 돌마면 율리(栗里)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하고, 낙생면에서는 남태희 전 면장이 주도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6일 저녁 5시경에 율리 마을 뒷동산인 모란봉에서 주민 100여 명은 봉화를 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는 것으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시작돼 같은 달 27일 분당리 장날에는 돌마, 낙생면의 연합시위로 이어졌고 대왕면 주민들까지 합세했을 때에는 그 수효가 3천 명에 이르렀다. 3월 28일 아침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27일과 같이 3천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이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총칼로 협박하며 강제해산시켰다. 또 동부면과 서부면에서는 이대헌, 김교영, 구희서 등이 3월 26일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송파, 오포면, 실촌면, 대왕면, 구천면, 중부면 등지에서 26일과 27일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일시에 봉화를 올려 신호를 함으로써 일본 측을 당황케 했다. 현재 성남지역인 중부면 탄리(炭里), 단대리, 수진리에서 운집한 300여 명의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3월 27일 남한산성으로 진입했다. 횃불을 신호로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과시한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에 집결하면서 평화적 시위에서 방향을 전환해 과격 양상으로 나타났다. 평소 친일 행각을 보이던 면장이 시위 동참을 거부하자 곤봉으로 면장의 머리를 가격했고 이에 일본 헌병이 발포해 강제해산 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산성이 조선시대 저항정신의 상징이며 근대화 과정에서 자주적인 군대 양성지였음을 감안하면 중부면의 만세시위운동은 면장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과격 형태로 진행됐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 지지와 열기에 고조된 신간회 광주지회 활약

3·1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이후로도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직후에 터진 ‘천도교 성미(誠米) 사건’은 천도교 광주교구장이던 한순회를 비롯해 김정봉, 한치백, 박무호 등 이 지역 출신들이 주축을 이뤘으며 모두 대거 소환조사를 받았다. 1923년부터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단기간 내에 전국적으로 확대돼 활발한 국민계몽이 시작됐다.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신간회’라는 단체를 통해 전개됐다. 1927년 6월부터 시작된 신간회 활동은 한백봉, 한순회, 한진회, 한용회, 한백호, 이대헌 등이 주축이 돼 ‘신간회 광주지회’를 이끌었다. 신간회는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자존의 독립정신함양과 노동야학, 교양강좌, 웅변대회와 각종연설회 등을 통해 국민계몽운동을 벌이는 한편,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폐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횡포에 대한 거족적 저항의식 고취, 관리와 경찰의 부정불의에 대한 정밀조사를 요구했다. 신간회는 전국에 약 140개소의 지회를 두고 3만9천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 농민과 노동자,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광주지회는 1927년 8월 24일 설립됐는데, 경성지회가 6월 10일에 설치된 점을 감안하면 빠른 시일에 설치된 것이어서 신간회에 대한 지지의 열기가 고조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간회 광주지회의 조직에서 주목되는 단체는 천도교 측이 농민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 구축한 산하 단체에서 등장한 ‘조선농민사 지국’, 1920년대부터 금주·금연 등 계몽운동에 치중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한 ‘청년회’, 사회주의 진영의 단체인 ‘노동공제회’가 있다. 석혜환, 정영신 등이 주도해 산성리에서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는 대표적인 사회주의 노동운동 단체다. 남한산노동공조회는 야학을 설립하는 한편 강연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노동계급의 의식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석혜환은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1929년에 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후반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3월, 석혜환은 원산파업단에 격문을 발송한 혐의로 10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고, 1935년 1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결성하고 비서부 책임자로 활동하다 체포돼 1936년 4월 경성지법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 남한산성 푸른 숲과 금림조합

현재 남한산성의 푸른 소나무들은 바로 남한산성의 주민들이 ‘금림조합(禁林組合)’을 결성해 일제의 무차별적인 벌목에서 지켜낸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삼학사 이후 살신성인의 애국정신으로 이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애국혼에 대해 광주·성남·하남 세 지역의 문화원이 2006년에 결성한 광주문화권협의회는 순국선열추모제를 공동으로 모시고 있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3편에서는 ‘하남의 이성산성(二聖山城)’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