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독립운동의 성지, 남한산성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한백봉 의사가 물산장려운동 당시 만들었던 멜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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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푸른 소나무 숲에는 외세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호국의 정기가 서릿발처럼 스며 있고, 암울한 주권 상실의 시대에서 빛을 회복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독립 운동의 역사 또한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의병항쟁의 중심지였으며, 만세운동과 그 이후 신간회 활동, 금림조합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 등을 통해 그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곧 남한산성은 인근 지역의 독립항쟁을 포괄하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나라 사랑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 의병 항전의 중심지 의병이란 국가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가 적과 싸우는 민중 의용병을 말한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정수(精粹)’라고 했다. 남한산성은 곧 의병 항전의 중심지였다. # 정미의병과 남상목 의병장 정미의병(1907~1910)은 성남지역 출신 의병장들이 활약한 시기였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4일 전문 7조로 된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바, 조선의 군사권·재판권·징세권이 박탈되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1907년 8월 1일에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광주의 화약고 2곳과 무기고 4곳을 폭파시켰다. 대량의 무기와 화약이 저장돼 있던 남한산성의 화약고는 의병에게 넘어갈 경우 일본군에게 치명적이었으므로 일본군은 황급히 폭파하고 말았는데, 이때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한다. 이 시기에 성남 출신의 남상목 의병장은 구식총 40자루와 신식총 10여 자루로 무장하고 전투를 별였으며, 윤치장 의병장도 광주 묵동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양주일대에서 활약했다. 남상목 휘하에서 좌익군장으로 활약한 김재선은 시위대의 퇴역병 출신으로서 전문적 군사지식을 의병 작전에 적극 활용했다. 남상목은 안성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으나, 무기 부족 등 전투력의 한계를 느껴 이에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잠시 집으로 가던 중 밀고자에 의해 체포됐고, 고문을 받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에 장 파열로 순국했다. 남상목 의병장의 애국충정은 마침내 남기형 후손과 성남문화원의 향토사 정립 노력이 모아져, 2007년 5월 28일 기념사업회가 창립되고 성남문화원의 청원으로 2008년에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돼 전국적인 기념행사를 가졌다.
1919년 2월에 고종 황제의 흉서(凶逝) 소식이 전해지자 국장(國葬) 문상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한백봉, 한순회 등의 주도하에 돌마면 율리(栗里)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하고, 낙생면에서는 남태희 전 면장이 주도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6일 저녁 5시경에 율리 마을 뒷동산인 모란봉에서 주민 100여 명은 봉화를 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부르는 것으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시작돼 같은 달 27일 분당리 장날에는 돌마, 낙생면의 연합시위로 이어졌고 대왕면 주민들까지 합세했을 때에는 그 수효가 3천 명에 이르렀다. 3월 28일 아침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은 27일과 같이 3천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이어졌으나 일본 헌병들은 총칼로 협박하며 강제해산시켰다. 또 동부면과 서부면에서는 이대헌, 김교영, 구희서 등이 3월 26일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송파, 오포면, 실촌면, 대왕면, 구천면, 중부면 등지에서 26일과 27일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는데, 이때 일시에 봉화를 올려 신호를 함으로써 일본 측을 당황케 했다. 현재 성남지역인 중부면 탄리(炭里), 단대리, 수진리에서 운집한 300여 명의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3월 27일 남한산성으로 진입했다. 횃불을 신호로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과시한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에 집결하면서 평화적 시위에서 방향을 전환해 과격 양상으로 나타났다. 평소 친일 행각을 보이던 면장이 시위 동참을 거부하자 곤봉으로 면장의 머리를 가격했고 이에 일본 헌병이 발포해 강제해산 되기에 이르렀다. 남한산성이 조선시대 저항정신의 상징이며 근대화 과정에서 자주적인 군대 양성지였음을 감안하면 중부면의 만세시위운동은 면장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과격 형태로 진행됐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 지지와 열기에 고조된 신간회 광주지회 활약 3·1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은 이후로도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직후에 터진 ‘천도교 성미(誠米) 사건’은 천도교 광주교구장이던 한순회를 비롯해 김정봉, 한치백, 박무호 등 이 지역 출신들이 주축을 이뤘으며 모두 대거 소환조사를 받았다. 1923년부터 민족지도자들이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은 단기간 내에 전국적으로 확대돼 활발한 국민계몽이 시작됐다.
# 남한산성 푸른 숲과 금림조합 현재 남한산성의 푸른 소나무들은 바로 남한산성의 주민들이 ‘금림조합(禁林組合)’을 결성해 일제의 무차별적인 벌목에서 지켜낸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삼학사 이후 살신성인의 애국정신으로 이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애국혼에 대해 광주·성남·하남 세 지역의 문화원이 2006년에 결성한 광주문화권협의회는 순국선열추모제를 공동으로 모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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