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한국 여인의 표상-여류문사 강정일당(姜靜一堂)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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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일당(1772-1832)은 우리가 잃어버린 효도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우고 참 아내의 도리를 일깨우며 참 한국인의 어머니상을 가르쳐 준다. 성남시에서 향토유적 제1호로 강정일당의 사적과 묘소를 지정한 것도 정일당의 정신을 시민들에게 바르게 가르치고 깨우치려 함이었다. 강정일당이 성남시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1982년 강주진 박사가 국역본 ‘정일당유고집’을 출판하면서부터 시작해 당시 성남문화원 조명천 초대원장이 강정일당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시조시인으로서 본인이 ‘여류문사, 강정일당’이란 논문을 쓰면서부터 차츰 알려져 사후 154년 만인 1986년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받게 됐다. # 품성과 행실이 빼어나고 단정
정일당 강 씨는 1772년 10월 15일 충북 제천군 근우면 신촌 집에서 아버지 강재수,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2남 1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정일당의 어머니의 꿈에 두 여자 성인이 찾아와 안고 있는 여자아이를 맡기며 “이 아이는 지극한 덕이 있어 지금 너에게 맡기니 잘 기르라!”했다고 전한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일당이 출생했다. # 가난한 남편과 결혼 후 남편 가르쳐 강정일당은 1791년 19세 때 여섯 살 연하인 윤광연과 결혼했다. 윤씨 가문은 학문을 높이 숭상한 명문가였으나 집안이 가난해 남편은 이렇다 할 글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품팔이로 살아갔다. 그러던 차에 강정일당과 결혼해 정일당에게 비로소 학문을 배우게 됐고, 아내의 도움으로 좋은 스승과 좋은 친구를 사귀면서 말년 즈음에는 당시 유림계에서 부러움을 사는 위치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나 정일당의 가정은 여전히 가난해 병이 나도 약 한 첩 먹을 만한 여유가 없어 3일 동안이나 혼절한 상태로 일어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정일당은 5남 4녀를 낳았지만 젖이 부족한 상태에서 치료 한번 해보지 못한 상태로 아홉 남매 모두가 일찍 죽었다. 태어난 지 반 년 만에 죽은 막내딸의 죽음은 정일당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 자식들 요절에 글로써 절절한 심경 표현 “얼굴은 단정하게 생겼고 안으로 몹시 영리해 난 지 3~4개월에 벌써 부모의 얼굴을 알아서 울다가도 부모를 보기만 하면 당장 울음을 그치고 가까이 가면 방긋방긋 웃다가 멀리가면 눈길을 돌려 보곤 하였다. 이것은 주자가 말씀하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라도 아비를 보면 웃는다.’는 것이 아니냐? ...... 아! 슬프다. 어떤 생명이고 호흡이 있는 것은 모두 나면 죽는 것이 하늘이 내린 이치라고 하나, 양육을 잘못하여 목숨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라 할 것인가? 이 애와 같이 어려서 죽는 것도 천명을 그렇게 타고 났다 하여 사람이 잘못한 것은 나무라지 않아도 좋단 말인가? 너무 슬프고 슬퍼서 능히 잊어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지문(誌文)을 만들어 묻었으니 ‘너무 정에 지나친 일이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제발, 사람들은 이 슬픈 사정을 알고 밭을 갈아 이 무덤에서 파헤치지 마소서!” 태어나서 한 돌도 살지 못하고 죽어간 막내딸을 비롯해 아홉 자녀 중 한 사람도 키워내지 못한 어머니의 아픈 가슴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래서인지 정일당의 글 중에 죽은 자를 위한 글이 10여 편에 이른다. 이웃에 사는 제자의 어머니를 위해 쓴 제문을 위시해 효자로 이름난 제자의 죽음, 형수, 친정 어
강정일당은 훌륭한 아내이면서 훌륭한 문인이었다. 정일당의 글은 한결같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등불과도 같은 주제로 일관하고 있다. 그가 남긴 40편 정도의 글 중에서 시어머니 지일당과의 화답시 ‘경차존고 지일당운’을 위시해 ‘제석감음’, ‘야좌’, ‘청추선’, 그리고 ‘탄원’ 등이 서정시로 분류할 수 있겠으나 오늘과 같은 서정이 아니라 읽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교훈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가난에 쪼들리면서 어렵게 살아온 시집살이, 친부모같이 30여 년 공경하고 모셔오던 시어머니 지일당마저 돌아가신 허전함 가운데 인생 50고개를 넘어가는 허탈함이 교차되는 섣달 그믐! 감상에 젖는 듯 하다가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 無僞虛送好光陰 / 일없이 좋은 세월 다 보냈어라 정일당에게 시 한 편을 쓰는 것은 가난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일당의 글은 운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문도 여러 편이 있으나 여기 ‘탄원기(坦園記)’ 한 편을 소개한다. “지금 한창 좋은 보배를 수레에 싣고 조심조심 길을 떠나서 인의(仁義)의 경지로 막 달려가는 참이다. 그리하여 그 돌무더기며 무지렁이 나무며 좁은 것이며 높은 것이며 우뚝한 것이며 혹은 깊숙한 것이며 혹은 비뚤어진 것이며 어디를 가도 모두가 탄탄한 길이다. 돌을 쌓아 올리면 산이 되고, 샘을 끌어 올리면 못이 되고, 꽃도 심고 과일나무에 접도 붙이고, 나물도 심고 약초도 가꾸면 심심찮은 가운데 살림에 보탬도 되고, 거문고, 술, 그림, 글씨를 가지고 산을 벗하여 들판을 거니는 마음으로 노닐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 벼슬을 하찮게 생각하고 녹을 우습게 여길만한 것들로서 탄원 주인의 참 즐거움이로다.” ‘정일당 유고’에서 정일당을 평한 권우인(權愚仁)의 글을 보면, “비록 부인이 지은 것이라 하나 여자의 기상이라고는 전혀 없고 산 속에 숨어 사는 선비가 뜻이 있어서 학문을 연구하는 글과 같다. 다른 부인들처럼 자기의 회포나 쓰고 꽃과 나비나 읊조리는 글과는 비유할 바가 아니다. 많은 글을 읽어서 자칫 자기의 뜻을 세웠다고 자칭하는 선비라도 아마 자기를 반성하며 정성을 다 하는 학문이라도 이만큼 진지한 삶을 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윤지당(允摯堂), 두 부인의 덕행이 있었는데 사임당은 시를 잘하고 윤지당은 문을 잘해서 이름난 분들이다. 정일당은 시만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사서 읽기를 좋아하였고 의심날 만한 곳을 밝혀 많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사임당과 윤지당은 시문을 잘했던 데 비해 정일당은 시문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잘 했다고 할 수 있다.” # 우리들의 큰어른으로 추앙 마땅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9편에서는 ‘북벌운동의 주역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선생’에 대해 소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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