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성남 천림산 봉수(天臨山 烽燧)의 역사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천림산 봉수복원 모형도(울산과학대 이영철 교수 작)
성남 천림산 봉수(烽燧)는 청계산 자락인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 35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돼 있다.
봉수는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려 군민(軍民) 합동으로 이를 대비하게 했던 경보장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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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를 올리는 시설물을 봉수대(烽燧臺) 혹은 연대(煙臺)라고 하며, 근대적 통신 시설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우역(郵驛) 제도와 함께 가장 빠른 통신방법이었다. 봉수는 인편이나 역마를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상 효율적이었다. 그러므로 봉수는 일반 백성들이 개인적인 의사소통이나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국가에서 정치적, 군사적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되고 운영됐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도는 전국에 다섯 개(5炬)의 직봉(直烽) 노선을 배치하고 그 직봉노선을 서로 연결하는 간봉(間烽)노선을 설치해 마치 거미줄과도 같이 전국 통신망을 봉수로 연결했다. 또한 바닷가에는 연대(煙臺)를 설치하고, 내륙에는 내지봉수 또는 복리봉수(腹裏烽燧)를 배설했고, 서울 목멱산(남산)에서 전국의 신호를 종합해 병조(兵曹)에 보고했다.
# 중국 주나라와 봉수
봉수제도는 이미 중국 주(周)나라 시대에도 있었고 한(漢), 당(唐) 시대에는 제도적으로 잘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봉수제도와 관련한 중국의 설화는 매우 의미 깊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서주(西周)의 유왕(幽王)은 포사라는 미인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으나 이 여인은 도무지 웃지를 않았다. 마침 봉화가 오르니 지방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집결하는 사건을 보고 포사가 웃음을 보여주었으므로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려고 세 번이나 허위로 봉수를 올려 지방의 제후들을 모이게 했다. 이렇게 세 번의 장난이 있은 직후, 신후(申候)가 견융(犬戎)족을 이끌고 주나라를 공격해 왔는데,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이 장난으로 알고 모이지 않아 마침내 주나라는 멸망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사마천의 ‘史記-周本紀’에 전해오고 있다. 서양의 고사에서 양치기 소년이 “늑대다”라고 장난쳤던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 삼국시대 이전 봉수 도입
우리나라도 초기 국가 시기부터 봉수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유천간(留天干)으로 하여금 망산도(望山島) 앞 바다에 나아가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을 시켜 승점(乘岾-輦下國)으로 나아가게 해 붉은 빛의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를 횃불로써 안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온조왕 10년(BC19)에 말갈족이 국경을 침입하므로 군사 200여 명을 보내 곤미천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하고 청목산(靑木山)에서 방어하고 있다가 다시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을 나와 공격했더니 적들이 퇴각했다.
또한 고이왕 33년(266)에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다는 기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양군 고적조에 고구려 안장왕 때 봉화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제14대 봉상왕(烽上王, ?~300)의 왕호에도 ‘烽’자를 사용하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을 했던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명에는 그가 “하원(河源)에 7년간 머물면서 봉수대를 설치하고 땅을 개간해 적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北史-신라전’에 “건장한 남자는 선발해 모두 군대에 편입시켜 봉수·변술·순라로 삼았으며, 둔영마다 부오(部伍)가 조직돼 있다.”고 했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그림과 함께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에는, 송의 사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매양 야간에는 항로 주변의 산 정상 봉수에서 횃불을 밝혀 순차적으로 왕성(王城)까지 인도했다고 했는데, 현재 전남 신안군 흑산도의 상라산 정상에 있는 봉수터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봉수는 조선의 건국과 함게 제도적인 정비를 하게 됐다. 태종 6년 함경도 경원지역에 흩어져 사는 군민들을 모아 성 가까이 모여 농사를 짓게 하고 적이 나오는 요충지에는 망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봉수를 설치해 적의 침입에 대비케 했다. 세종 때에는 4군 6진의 개척과 산성의 수축 등 다양한 국방 대책이 진행됐고, 세종 19년 2월에 각 도의 변방에 봉화를 설치하고 여기에 연대(煙臺)를 높이 쌓고 근처에 사는 10여 인을 모집해 봉졸(烽卒)로 배정, 3인이 근무하게 하고 5일 만에 교대를 하게 했다. 전국의 봉수는 시대에 따라 설치와 폐지, 통폐합 등의 조치가 있어서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최대 738개의 봉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 천림산 봉수의 중요성
천림산 봉수는 천천산(穿川山) 봉수, 천천현(穿川峴) 봉수, 월천현(月川峴) 봉수 등 여러 가지의 명칭이 전해오는데, 조선 후기부터 천림산 봉수로 불려졌다. 이처럼 이름이 다르게 불려지기는 했지만 위치는 변동 없이 유지됐고, 경기감사가 직접 관리 감독했을 정도로 중요한 봉수였다. 천림산 봉수는 다섯 개의 직봉 노선 가운데 두 번째 노선의 마지막 전달 봉수였다. 이 노선은 부산 다대포진 응봉(鷹峯)에서 시작돼 용인의 석성산 봉수를 거쳐 천림산 봉수에서 그 신호를 전달받아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전달했다. 천림산 봉수는 용인 석성산 봉수와 18.75㎞ 떨어져 있고, 서울 남산과의 거리는 16㎞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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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결과, 천림산 봉수는 장반타원형으로 둘레는 82.5m이며 하단부 둘레는 85m 가량이다. 서울 남산을 향한 다섯 개의 연조(煙? : 굴뚝)와 방호벽·담장시설·계단식 출입시설·봉수군의 거주와 비품 등을 보관하기 위한 부속 건물터가 확인됐고, 방호벽은 동서 길이 33.8m, 남북 길이 12m, 내부면적은 333㎡로서 약 100평 정도이며, 내지봉수의 전형적인 구조를 온전히 갖추고 있다.
천림산 봉수는 문헌기록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에 전국 봉화제가 열렸는데, 이 때 고희영(현 성남시의원)씨가 주도해 성남문화원과 공동으로 제1회 봉화제를 개최했다. 그러나 제1회 봉화제는 인릉산의 ‘봉화뚝’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개최했고, 제2회 통일기원 봉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금토동 원주민 윤효상 씨가 제보해 천림산 봉수의 위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에 1999년 10월 1일에는 전국 최초로 봉수 관련 학술회의가 성남문화원 주최로 열려 학술적 가치를 규명했던 것이다. 학술적 고증을 토대로 토지박물관에 의해 2000년 4월에는 봉수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다음해에는 봉수터 발굴조사와 건물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 기록 찾기 힘든 봉수대 제 모습
그렇다면 봉수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봉수대의 구조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수원의 화성봉돈은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그림과 규격 등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지역의 봉수는 이처럼 완벽한 도면이 없을 뿐 아니라 사용된 재료도 대부분이 자연석을 사용해 축조됐다. 단지 세종 29년의 기록에 의거해 10척 이내의 크기로 아래 쪽은 넓고 위쪽은 뾰족하게 생겼다고 하는 것과, 성종 6년에 연기가 잘 올라갈 수 있도록 전국의 모든 봉수에 굴뚝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근세의 기록으로는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차상찬의 ‘朝鮮史外史’ 제1권에 ‘봉화의 배설 방법’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연통의 높이는 약 1장 5척(4.5m)인데 절반 이하부터는 4면의 각각 넓이가 약 1장 1척(3.3m)이고, 절반 이상부터는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게 됐다. 또 연통을 만드는 데에는 먼저 내면을 진흙으로 바른 다음에 표면 또한 진흙으로 발라서 연기가 새나오지 못하게 하고 통 위에는 밑이 없는 옹기 동이를 만들어서 덮었으니, 그것은 몰론 연기를 잘 나가게 하느라고 그리한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는 검은 화로에 부엌 아궁이가 있으니 땅에서 약 석자 거리(90㎝)되게 만들고 상하 좌우가 각각 1척 5촌(45㎝)이 돼 네모 반듯하고, 문을 해 달아서 자유로 열었다, 닫았다 하게 하고 그 화로의 아궁이 문은 속에다 나무를 넣고 진흙으로 싸 발라서 불길에 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남문화원은 학술세미나와 토론회 개최 및 ‘한국의 봉수 40선’, ‘봉수 문헌 자료집’을 발간했으며, 전국의 봉수 실태조사와 문헌기록 조사를 통해 복원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9편에서는 ‘여류문사 강정일당의 생애’에 대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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