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20) 북벌운동의 주역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선생

성남까치 2009. 8. 31. 12:37

(20) 북벌운동의 주역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선생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백헌 이경석 선생 묘지

기호일보

이경석(1595~1671) 선생의 본관은 전주, 자 상보(尙輔), 호 백헌, 시호 문충(文忠). 정종대왕의 손자인 신종군 이효백(新宗君 李孝伯)의 5대손이다. 이효백은 궁술이 뛰어나 세조 5년 모화관(慕華館)에서 있었던 활쏘기에서 30시(矢) 중 29시를 적중시켜 당상관이 됐고, 종친은 과거에 응시가 금지된 규정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허락돼 무과에 합격했고, 세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효백 묘소는 성남문화원의 제4회 학술토론회에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성남문화원의 청원으로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2008년 9월 17일)됐다. 

 # 일찍이 드러난 재능

   
 

백헌 선생은 형인 석문 경직(石門 景稷)에게 글과 역사를 배웠고,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하루 종일 글을 읽었을 뿐 아니라, 가난해 해마다 굶주렸지만 흉년이 들었던 해에는 아침에 나갔다가 배고픔을 참으며 태연히 돌아오다가도 어머니께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면 기다렸다가 나중에 방으로 들어갔으니, 효성이 지극해 효자 정문을 받았다.

13세 때 부친의 임지인 개성에 따라갔을 때 청음 김상헌이 공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기특히 여겨 “후에 우리 같은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출세할 것이고 인격이 출중하리라”했으니, 훗날 공은 영의정으로, 김상헌은 좌의정이 됐다. 1617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됐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신할 때 조정의 백관이 질서 없이 흩어져 버리고, 따르는 신하는 공과 승지 한효중과 내시 2인뿐이었다. 그 후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쳐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이 해에 임금이 공의 아버지를 위해 밀감을 하사하니 공은 감격해 시를 지었고, 온 장안 선비들이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시를 외우기까지 했다.

  # 왕의 설득으로 통한의 삼전도비문 작성

병자호란을 당하자 임금이 공의 의견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공은 형 이경직과 동악 이안눌, 계곡 장유 등과 함께 개원사에 머무르며 밤중이면 다시 일어나 임금의 행궁을 살펴 드리고 문안을 드린 다음, 돌아와서는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항복하고자 출성하기에 이르자 눈물이 흘러 앞을 가리니 인조가 이를 민망히 여겨 수행치 말도록 명하기도 했다. 호란 후 도승지와 예문관 제학을 겸해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지었다. 청 사신이 비문 작성을 심하게 독촉하므로 왕이 장유(張維)와 조희일(趙希逸)과 공에게 지을 것을 명하니, 조희일은 병을 핑계로 기피했고, 장유의 글을 청 사신이 보고 전혀 수식함이 없다하고 큰 소리로 심히 꾸짖거늘 공이 그 때에 예문관 제학을 맡고 있던 지라, 인조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언급하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경이 수치스러운 항복비문 작성을 피하는 충성심은 충분히 이해하나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항복한 내심을 헤아리고자 함이니, 비문으로 의심한다면 국가가 위험하다. … 사소한 문구에 구애됨이 없이 비문을 그들의 뜻에 맞게 지어주고 후일을 기약할 것이다. 경 일신의 명예나 이해를 생각 말고 나라를 구하라.”했다.

공은 비분의 눈물을 삼키며 비문을 지어 올렸고,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왜 나에게 글공부를 시키셨습니까? 참으로 천추의 한이 됩니다.”고 했다. 또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부끄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백길 되는 오계(삼수변+吾 溪)물에 투신하고 싶다.”했으니 공의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 청나라로 가 소현세자 보필

어느 날 ‘시경(詩經)’을 강론하는데 “군자가 오직 즐거워하는 것은 천자의 나라를 훌륭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는 구절에 이르러 임금이 크게 탄식해 눈물을 지우니 공도 또한 이시백과 더불어 모두 눈물을 뿌렸으며,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 모두 감격해 마지 않았다. 1637년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貳師)가 돼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했다. 당시 심양(瀋陽)에는 병자호란으로 고관 자제들과 국가 중신, 세자 등 다수가 인질로 억류돼 있었는데 김상헌, 박연(朴演), 조한영(曺漢英) 등 다수가 귀국하게 된 것은 오로지 공이 노력한 까닭이었으나 후일에 발설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또,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고 봉황성에 구금됐다. 이때에 대신 이하로 구금된 사람이 많았는데, 모두의 의견이 뇌물을 써서라도 화를 면해보려는 생각이 많았으나 공은 이를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사형까지는 안 될 것인데 살기 위해 나라의 돈을 쓰는 것이 내 한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불가할 뿐 아니라, 얼음장 같은 산과 북쪽 바다처럼 검은 청인(淸人)들의 속셈은 내 처음부터 달게 여기는 바라.”고 했다. 얼마 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귀국했으나 공만 홀로 붙잡혀 8개월간 구금됐다가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1645년(인조 23)에 영의정에 올랐는데 이 해에 왕세자인 소현세자가 별세했고, 은둔인사였던 송시열, 송준길 등 인재를 추천해 등용했다. 공은 송시열을 항상 대등하게 예를 갖추어 대했으며, 효종 즉위 초에도 가장 먼저 불렀는데, 공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한 구절에서 오해가 시작된 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멀어지게 됐고, 마침내는 송시열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자세가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해 묘소 앞의 신도비가 훼손되기까지 했다.

 # 반청 북벌정책 책임자 자임, 가까스로 극형 면해

1650년(효종 1) 김자점의 밀고로 인해 조선의 반청(反淸) 북벌(北伐)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 6인이 의주부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즉시 어전회의에서 공이 일체의 책임을 홀로 지고 감당하겠다고 자진하므로 왕이 위험을 우려하니 “소신 한 몸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살신성인하여 나라를

   
 
구하겠습니다.”하고 의주까지 가서 영접했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도착해 백관을 남별궁(南別宮, 조선호텔 자리)에 집합시키고 국왕을 추궁하고 협박하니 그 책임이 왕에게 미치게 됨으로 공이 이르기를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고 왕은 모르는 일”이라 했다. 외교문서 작성자를 물으니 조경(趙絅)이 “내가 작성했으나 상부지시라.”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가 수상으로 이 역시 나의 책임이라.”했고, 다음 날 일본과 내통한 점을 추궁하니 “이는 오해요 왜(倭)의 태도가 수상하여 대비책으로 국방을 준비한 것뿐이라.”고 답했다. 이에 청나라 사신은 누차 일인(一人) 책임인가를 다짐하니 태연한 태도로 시종일관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흉흉하기만 했고 모두가 두려움에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이 날 신명의 위험이 급박한지라 가족들은 장례 치를 도구를 준비해 문 밖에 대기했으나, 공은 안색이 정연해 터럭만큼의 두려움도 나타내지 않고, 응답이 의연해 사소한 착오도 없으니, 좌우에서 보는 자가 깜짝 놀라지 아니함이 없고, 청의 사신들도 서로 말하기를 “동국(東國)에는 홀로 백헌 이상국(相國-영의정)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하고 감탄했다. 효종대왕이 역관(譯官) 정명수에게 천금(千金)을 주어 청 사신을 달래게 하는 등 극력 주선으로 극형을 면해 의주 백마산성 가시울타리 속에 안치(安置)당했다. 백마산성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사형을 당하게 될 위험이 몇 차례 있었으나 공은 답답함과 위태로운 빛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존경했다. 12월에 석방되니 앞으로 영원히 벼슬에 등용하지 않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보내라고 하는 조건부 석방이었다. 공이 돌아오는 수레 주변에는 백성들이 미어지게 모여 훌쩍훌쩍 울며 서로 다투어 공의 모습을 보기를 다투었다. 

 # 77세 졸, 사후 녹봉의 효시

58세 때 판교에서 친지들과 수동계(修洞契)를 열었고, 1653년 이후 영중추부사에 오른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을 받아 현종이 온천에 갈 때에는 서울에 머물러 임금대신 정무를 맡아보는 유도대신(留都大臣)을 네 차례 맡기도 했다. 74세 되던 현종 9년 11월 27일에 임금이 궤장(?杖)을 내려 주었는데, 공이 누차 사양했으나 삼공육판서(三公六判書) 전원이 수행하고 궁중악대와 연회음식 일체를 하사하니, 궤장과 함께 그 때의 잔치를 그린 ‘사궤장연회도첩(賜?杖宴會圖帖)’이 보물 제930호로 지정돼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76세에 노환이 심하니 임금이 전의를 보내고 약을 하사했으나, 다음 해 세상을 달리했다. 운명하자 백기(白氣)가 침실에서 일어나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인조, 효종, 현종 세 임금을 보필했고,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그 명성이 세상에 떨치어 시골 부인들까지도 공의 이름은 모르나 백헌이라는 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가뭄이 드는 해에 공이 비를 빌면 비가 오지 않은 때가 없었다. 공의 부고를 들은 전

   
 
국의 유생들도 글을 지어 애도했다. 영상 정태화가 공의 생전에 가정이 빈한(貧寒)했던 것을 왕에게 아뢰어 별세한 공에게 3년치의 녹봉(祿俸)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대신의 사후(死後)에 녹봉을 주는 것이 공으로부터 비롯됐다.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백헌 상공이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구국의 충신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박세당은 공의 신도비문에서 “붉은 충성심은 하늘을 꿰뚫었고 굳센 절개는 서릿발 같았으며, 험한 일 어려운 일을 잘 대비해 넘겼다.”고 했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니 공이 남긴 시가 5천 수요, 문장이 800수가 넘었는데, 이 가운데 시 1천800수와 문장 500수를 간추려서 간행했고, 숙종 임금이 읽은 후 느낌을 시로 지어 내려주기까지 했다. 또한 글씨에 능했고,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 등에 제향됐으며, 청계산 남쪽 대감능골에 있는 공의 묘소는 경기도기념물 제84호(1985년 9월 20일)로 지정됐다.  

※ 숙종대왕 시

<觀白軒集有感賦詩 / 백헌집을 읽고 느낌이 있어서 짓다.>

多年求覓得何遲 / 오래도록 (그대의 시를) 찾았다가 이제야 뒤늦게 구해놓았더니
終日披看不自疲 / 온종일 책장 넘기며 읽어도 피곤한 줄 모르네.
衷款愛君章奏見 / 임금 사랑하는 깊은 마음은 올린 글 곳곳마다 보이고
誠純體國鬼神知 / 나라를 내 몸처럼 여기는 마음은 귀신들도 알았다네.
先祖賜杖隆恩禮 / 선왕(현종)께서 궤장(?杖)을 내리시어 큰 은덕을 베푸셨고
聖祖頒柑荷寵私 / 성조(聖祖, 인조)께서 감귤을 내리셨다니 남다른 총애를 입었구나.
德協台司賢宰相 / 덕으로 삼공(三公)을 화합시킨 어진 재상이었으니
宋時文靖可方之 / 송나라 때 문정공(文靖公)에게 견줄 만하네.


 ※ 백헌 선생의 시

<병자호란 후 대군(大君)을 따라가는 궁녀의 어미가 손가락을 잘라주며 딸과 이별하니 듣는 자들이 코끝이 찡했다.>

모녀가 괴로이 생이별을 하는데
서로 붙잡고 길에서 통곡하는구나.
스스로 능히 목숨을 가볍게 여겼거늘
어찌 다시 살갗을 아끼리오?
떨어진 손가락에 옷은 붉게 물들고
애간장이 끊어져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지네.
간곡히 뜻을 같이하는 이에게 말하노니
죽음을 아끼는 것은 결코 장부가 아니라네.

<出寓晩休亭 / 만휴정에 나가 머물며>

西出西湖湖水明 / 서쪽으로 서호에 나가니 물빛도 밝은데
閑亭亦以晩休名 / 한가한 정자라 이름도 만휴(晩休)
吾身已脫人間累 / 내 몸은 이미 인간세상의 구속을 벗어났나니
欲學沙邊白鷗輕 / 가볍게 나는 저 물가의 백구를 배우고 싶구나.

한편 1999년 성남문화원에서 개최한 제4회 학술회의에서 백헌 이경석 선생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됐고, 이후 2004년 4월 문화관광부 주최 ‘이달의 문화인물’로 백헌 이경석 현창사업이 추진된 바 있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21편에서는 ‘분당 오리뜰 농악과 판교 쌍용거줄다리기’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