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바른 삶의 청백리 선비들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 흑기총(黑麒塚)=맹사성이 온양 고택 뒤 설화산 기슭에서 검은소가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것을 구해주었더니 집에까지 따라오므로 길러 서울을 오갈 때 타고 다녔는데 맹사성이 별세하자 소도 슬퍼하며 굶어 죽었으므로 묘를 만들어 주고 술잔을 부어줬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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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주변으로는 우리가 삶의 표상으로 본받아야 할 참된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선비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여러 인물들 가운데 고려 말에 지조를 굽히지 아니한 송산 조견, 둔촌 이집, 조선의 청백리인 이지직, 이병태, 이경석, 한계희 등은 이미 소개했고, 광주와 하남 일대에 전해오는 상촌 김자수, 음촌 김약시 등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와 묘소 등의 문화유산에 대해 소개한다.
# 망국에 자결한 고려충신 김자수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의 본관은 경주. 자는 순중(純仲)이다.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형조판서, 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했다.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했다. 조선 건국 후 태종이 형조판서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 “한 나라의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 같이 죽는 것이 도리이다. 내 평생에 충효로써 스스로를 가다듬어 왔는데 이제 몸을 잃으면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내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하고는 자결하고 말았다. 묘소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있고, 경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됐다. # 부전어동에 낙향생활한 김약시 김약시(金若時, 1335~1406)의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음촌(陰村),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고려가 망하니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현재 성남시 금광동) 산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겨우 피할 정도로 하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받지 않으니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 했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하게 상심하며 흐느끼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그를 찾아내 관직을 주었으나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819년(순조 19)에 광주(廣州) 유생 유억주 등이 상소해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됐다. 묘는 현재 신구대학 캠퍼스 자리에 있다가 성남시 개발로 광주시 실촌면 삼합리로 이장했고,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유형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됐다. # 청백리로 기상 지킨 안성 안성(安省, 1344~1421)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 설천(雪泉)·천곡(泉谷), 시호 사간(思簡)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조선 건국 후 태조·정종·태종 등을 섬기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 안성은 어릴 때 한쪽 눈이 작아서 소목(少目)이라 불렸는데, 고려 우왕 초에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우왕이 이름이 괴이하다 해 少와 目을 합쳐 성(省)으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조선 건국 후 청백리로 뽑혀 개성유후에 임명되니 그는 통곡하며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하며 궁궐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몸부림치니 시위(侍衛)들이 달려들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다”고 했다. 결국
# 조선 전기 문화창달 기여한 맹사성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이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해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을 하사받고,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했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 검소해 항상 남루한 행색이었다. 고향인 온양에 부모님을 뵈러 갈 때 각 고을에 알리지도 않았고 관가에도 들르지 않았으며 간혹 소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양성과 진위 두 고을 수령이 맹 대감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어찌 알고는 장호원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이때 소를 탄 늙은이가 지나가므로 두 수령은 아전들을 시켜 꾸짖게 했다. 맹사성은 꾸짖는 아전들에게 “너의 주인에게 가서 내가 온양에 사는 맹고불이라고 말씀 올리거라”하니 두 수령은 화들짝 놀라 달아나다가 깊은 연못에 관인(官印)을 빠뜨려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용인의 객사에 들렀을 때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의 선비와 장기를 두다가 나눈 ‘공당문답’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벌주에 만취한 구치관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의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이율(而栗)·경률(景栗), 시호 충렬(忠烈)이다. 1429년(세종 11) 문과에 급제해 한림학사가 됐으나 성격이 정직하고 아첨하기를 싫어해 10년이 지나도록 항상 낮은 벼슬에 있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해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1455) 추충좌익공신에 책록됐다. 요직을 두루 거쳐 세조 12년 영의정이 됐다. 관직에 있을 때 산업을 장려했고, 정직·청렴한 성품으로 청탁을 배격한 청백리의 본보기가 됐다. 신숙주가 영상이 됐을 때 구치관이 새로 우상이 됐다.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 이르기를 “오늘 내 경들에게 물음이 있을테니, 능히 대답한다면 괜찮지만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하매, 둘이 모두 절하며 사례했다. 세조가 “신정승(申政丞)”하고 부르매, 신숙주가 대답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新政丞)를 불렀다. 경이 대답을 잘못했도다”하고는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또 “구정승(舊政丞)”하고 부르니 구치관이 곧 대답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난 옛(舊) 정승을 불렀으니 경이 대답을 잘못했네”하고는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또 “구정승(具政丞)”하고 불렀더니 숙주가 곧 대답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난 성(姓)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했소”하고는 벌주를 주었다. 또, “신정승(申政丞)”하고 불러도 신숙주와 구치관 모두 대답하지 않고 “구정승(具政丞)”하고 불러도 구치관과 신숙주가 모두 대답하지 않으니 세조가 이르기를,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니라”하고는 역시 벌을 주었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서 심히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구치관이 군사에 관한 일을 잘 알았으므로 세조가 공에게 명해 진서대장군을 삼아 방비케 하고는 좌우에게 이르기를, “구능성(具綾城)은 나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야”라고 했다. # 3대에 걸쳐 12명이 정려받은 진주 정씨 문중 하남시 초이동에는 진주 정씨의 세거문중 묘지가 있는데, 하남의 진주 정씨는 6대에 걸쳐 충효 1명, 충신 1명, 효자 5명, 열녀 5명 등 모두 12명의 정려(旌閭)를 받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 중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 정매신(鄭梅臣) 등 3명이 청백리에 뽑힌 인물이다. 정척(1390~1475)은 성품이 정성스러운 사람으로서 효도가 지극했다. 태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겼는데, 세조가 정척에게 말하기를, “부왕께서 항상 청(淸)·직(直) 두 글자로써 경을 인정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하고 옷과 말을 하사했다. 정성근(1446~1504)은 정척의 아들이다. 대마도에 선위사(宣慰使)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주는 화선, 호초(胡椒)등을 통렬히 물리쳐 노여움을 받아 거의 돌아오지 못할 뻔 했으나 오랑캐들도 그의 청렴함에 감복했다. 효성이 지극해 부모의 시묘살이에 그릇 씻는 일도 종을 시키지 않았고, 성종대왕이 승하하자 심상(心喪) 3년을 극진히 해 문 밖에 통나무집을 짓고 거처하며 거친 밥과 나물국으로 3년상을 마쳤다. 갑자사화에 연루돼 군기시 앞에서 참수됐는데,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청백리에 뽑혀 암사동의 구암서원에 둔촌 이집과 함께 배향됐다. 그의 아들 정주신은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에 슬퍼하다가 6일간 단식 끝에 치아가 다 빠지고 손가락이 다 떨어져 33세로 죽었다. # 평양감사 때 받은 선물이라곤 담뱃대 하나뿐인 김종수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정부(定夫), 호는 몽오(夢梧)·진솔(眞率),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진사가 되고, 1780년 이조판서가 돼 홍국영(洪國榮)을 몰아냈다. 의금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36편에서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의 충신들’에 대해 소개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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