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병자호란에 순절한 충신과 백성들 |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
법화암부도(가운데 부도에는 평원당선백대사라고 새겨져 있다.) | ||||||||||||
| ||||||||||||
남한산성 주변 여러 곳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대표로 기억되는 사례가 쌍령(雙嶺)리 전투 순국자들의 사당인 정충묘(精忠廟), 남한산성 북문 밖 법화골에는 300명 병사들의 희생 이야기와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전사시킨 유적, 성남에는 충청병사 정세규(鄭世規)가 청군과 전투를 벌여 피가 냇물을 이룬 험천(險川)에 전해 진다. 당시 각지에서 구원병이 출동했으나 작전에 성공하지는 못해 원주영장 권정길(權正吉)이 맨 먼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黔丹)에 들어가 점거했고, 적은 군사로 많은 수의 적을 당해 낼 수 없어 끝내 패해 물러나기는 했으나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앉아서 보기만 한 채 진군하지 않은 장수들과는 혁혁한 애국혼의 자취가 전한다. # 군졸이 총 쏴 청 태종 매부 양고리 장군 사살
병자년 12월 28일 영의정 김류가 작전을 잘못 세워 조선군 총수(銃手) 300여 명이 북문 밖으로 출전했다가 적의 유인 작전에 휘말려 별장 신성립, 지여해, 이원길 등을 비롯한 300여 병사가 모두 함께 죽었으며, 오랑캐 군사는 2명만 죽었을 뿐이다. 김류는 자신의 잘못을 북성장 원두표가 구하지 않았다고 핑계해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니 좌의정 홍서봉이 “수장의 잘못을 부장에게 죄로 돌리는 데가 있는가?”라고 묻자 김류는 부득이 왕의 처소에 나가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질해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처럼 군사의 일에 어두운 사람이 지휘관이 되므로 군사들은 “흰 옷 입은 자는 지휘관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청원할 정도였다. # 험천전투에서 69세로 전사한 최진립의 기개 인조 15년(1637) 1월 15일 도원수 심기원(沈器遠)이 군관 지기룡에게 대구어 알과 연어 등의 물품과 함께 보낸 보고에서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함경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군사를 합쳐 양근(양평)의 미원(薇原)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2만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평안도 별장이 800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에 도착했다.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에 도착했는데, 교전하지도 못하고 패했으며, 우병사 민영(閔 木+永)은 한참동안 힘껏 싸우다가 역시 패해 죽었다. 충청감사 정세규가 진군해 용인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적에게 패해 생사를 모른다”고 했다. 분당구 대장동에서 발원해 낙생저수지, 분당구 금곡동 동막골과 머내를 지나 탄천으로 유입되는 험천(머흐내, 동막천)에는 병자(1636)년 12월 27일에 정세규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정충묘는 병자호란 때 순국한 장군들의 절의를 기리고 제를 드리기 위해 초월읍 대쌍령리 3번 국도변에 건립됐다. 이곳 쌍령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안동영장 선세강(宣世綱),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 등 4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하던 조선군은 엄동설한에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열악한 보병(步兵) 부대였고, 평소에 잘 훈련된 강력한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우게 되니 적은 기마부대(騎馬部隊)가 주력이므로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우리 군사가 전멸지경에 이르자 허완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고, 민영, 선세강은 전사했으며, 죽주산성(竹州山城)에 진을 치고 있던 이의배도 추후 군사를 이끌고 투입됐으나, 패하고 말았다. 미수 허목이 지은 허완 묘비명에 “공은 군중(軍中)에 있을 때에 두 아들에게 편지를 전했는데, 목숨 걸고 싸울 뜻만 말했지 집안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또, 천성이 바르고 근엄해 예로써 사대부를 대접하고, 군대를 다스릴 때에도 비천하다고 멸시하거나 친근하다고 사사로이 대한 일이 한 번도 없어서 이것으로 사졸의 마음을 얻었다. 벼슬이 높아진 뒤에도 항상 변방에 있었으며 조금도 자신을
# 음력 정월 초이틀날 광주문화원과 주민 협력으로 정충묘 제례 전쟁이 끝나고 4월 7일에야 비로소 예조의 청으로 쌍령과 험천의 시체를 매장하고 전사한 장군들과 병졸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왔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 때에 국가 재정의 절약을 위해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 또한 철폐령에 의해 제향(祭享)이 중단됐으므로, 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저녁에 마을제사로 제향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음력 초사흗날에 광주문화원이 주관해 대쌍령리 주민들이 협력해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정충묘 제례’를 올린다. # 가뭄 때 숙종이 전사한 군졸 영혼 달래는 기우제문 짓기도 숙종과 영조, 정조 임금이 이곳을 직접 찾았으니, 숙종 14년(1688) 2월 29일 임금이 쌍령을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묻기를, “여기가 바로 병자년에 싸우다가 패망한 곳인가?”하니,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비록 사람의 꾀가 훌륭하지 못해 끝내 패망하게 됐지만, 그 충의(忠義)와 절개만은 높일 만 합니다”하므로, 임금이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숙종 임금이 직접 기우제 제문을 짓기도 했다.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35편에서는 ‘광주(廣州)의 청백리들’에 대해 소개됩니다.> |
'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37) 남한산성의 의미와 보존활용 (0) | 2009.12.22 |
---|---|
남한산성36편-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의 충신들 (0) | 2009.12.15 |
(35) 바른 삶의 청백리 선비들 (0) | 2009.12.08 |
남한산성(33) 충정공(忠貞公) 정뇌경(鄭雷卿)의 충절 (0) | 2009.11.24 |
32-천선(天仙)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0) | 2009.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