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38-完...전통문화와 역사 복원의 남한산성 둘레

성남까치 2009. 12. 29. 10:41

 

출처=조선고적도보 (남한산성 행궁과 수어장대) 

 

편집자 주=

그 동안 본보와 광주문화권협의회는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이란 기획물을 통해 남한산성의 역사와 이를 중심으로 한 성남-광주-하남권의 역사 그리고 문화유산, 인물 등을 다루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재조명해 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문화재청은 경기도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을 비롯해 대곡천 암각화군, 염전, 서남해안 갯벌, 익산역사유적지구,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 중부내륙산성군 등 총 7건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키 위해 29일 외교부를 거쳐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는 내년 1월 초 심사를 거쳐 1월 말께 홈페이지에 결과를 발표한다. 이번 등재는 서류전형으로 진행돼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인류역사의 시원(始原)이며 백제시대 이후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계획도시의 초창기 모델로 자리매김했고 아울러 독립운동의 근원지이며 외침에 항거한 충신들의 고고한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였음을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 남한산성에 대한 품격있는 유적지 복원과 조성 및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길 희망해 본다.

‘큰 역사의 숨소기리가 있는 남한산성’은 이번 38편을 마지막으로 지역민은 물론 국민 모두가 하나의 문화적 자존심을 느낄 수 있도록 집필에 힘쓴 광주문화권협의회 한춘섭 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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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는 경기도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근세로 내려와서도 현재 서울의 강남 일대와 경기도 하남시·성남시·이천시·여주군·남양주시 일부 등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광복과 6·25전쟁 이후 서울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서울지역에 편입되는 지역이 늘어났고, 서울시의 철거민 정책에 의해 광주 땅 한적하던 곳에 물밀듯이 인구가 급증하면서 1973년에 성남시가 분리됐다. 그리고 1989년에 하남 신장지구에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광주의 동부면과 서부면 일대가 하남시로 승격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광주와 하남, 그리고 성남의 행정구역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화 되고 있다. 추진 과정에 합리적 의사결정 논의 과정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으나 문화적인 면에서 세 도시의 통합은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 역사성과 문화적 상징성 인정 못받는 남한산성

도시개발의 선두 대열이라 할 수 있는 성남은 현대도시로서의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닌 시승격 37년 청장년의 나이테로 굵어졌다. 하지만, 워낙 급속도로 도시화가 전개되면서 전통문화의 파괴와 상실로 인해 성남시민들조차도 우리 고장의 뿌리를 모르는 이가 의외로 많다. 하남시는 이성산성과 고려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거대한 천왕사터, 그리고 백제의 도읍터로 여겨지는 고골 일대의 많은 문화유적이 한강 수로를 배경으로 발전된 문명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그린벨트 지역이 지나치게 많은 데다가 축사가 난립해 체계적인 도시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옛 광주의 모태가 되는 지금의 광주시에도 오랜 역사 속에서 선조들이 간직하고 가꾸어온 문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문화유산들은 행정구역의 분리와 함께 기형적으로 연구되고 관리돼 왔다. 문화유산은 공통적 문화의 특징들을 통합적으로 연구 보존 전승해야 하는데, 행정구역이 다르기 때문에 각 행정 단위의 형편에 따라서 일관성없이 유지 관리돼 온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한산성을 둘러싼 혼란이다. 남한산성의 행정구역은 광주시가 대부분이지만 실질적인 방문자수는 성남이나 서울 사람들이 더 많은 데에서 일반인들의 인식은 성남의 남한산성으로 인식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남한산성이 지닌 역사성과 주변 도시를 포괄하는 문화적 상징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 성남·광주·하남

광주 문화권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거주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해서 성남의 삼평동, 광주의 장지리와 실촌읍 삼리와 궁평리의 구석기 유적, 하남 미사리의 신석기시대 유적, 암사동의 선사유적지 등은 인류 역사의 시원(始原)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로 부여에서 남하해 온 고구려 주몽과 같은 혈통의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면서 한강의 남쪽은 근 500년 가까이 백제의 중심 수도가 됐다. 송파의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은 백제계통의 맥이 흐르는 문화유산이다.
백제는 한강 남쪽 일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자주 했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와 신라가 시시때때로 넘보는 요충지였다. 그리해서 남한산성이나 하남의 이성산성 등이 국방의 중요한 보루로 인식됐던 것이다. 온조대왕이 어머니 소서노 그리고 열 명의 신하들과 수천 명 집단 유민으로 남하해 터를 잡았다는 한강 남쪽지역 하남 이성산성 둘레의 ‘한성백제’ 건국 이야기를 통해 진취적 용맹성을 짐작케 하며, 평화로운 나라의 백성을 다스려 보자는 온조와 소서노의 건국 야망이 서린 이곳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도왔던 천하 여걸 소서노(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제왕일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여인/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가 터전을 잡은 한 자락이다.
훗날 백제가 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밀려 495년 만에 멀리 남쪽 공주로 도읍을 옮겨가고 난 후 다시 이 지역은 신라가 차지했고, 문무왕이 주장성(晝長城=남한산성)을 석성(石城)으로 쌓은 후로 남한산성은 이 지

   
 
역의 중심이 됐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수도 서울의 안보를 보장하는 최고의 요충지로서 유사시 임시로 수도를 옮기기 위한 행궁 등의 시설을 갖추고 일정한 인구를 정책적으로 이주시켜 관리한 명실상부한 계획도시의 초창기 모델이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광주 일대에 은둔해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일이 사실대로 구전으로 혹은 문헌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그들의 묘소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이로써 이 땅에 살아온 40여 집성촌 세거문중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이 서로 왕래하고 교류하면서 이 땅을 지켜왔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성남시 ‘탄천(숯내·숲내)’ 16㎞의 물길 주변 들판과 경안천의 길고 느릿느릿하면서도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경안천 주변으로는 우리 문자가 없었던 신화 속 역사에서도 농경생활로 끊임없이 대가 이어졌고, 풍부한 물고기 잡이와 기름진 산과 들에서 농사를 일구어 왔던 삶의 터전이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 묘택(사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충효와 청백리 큰 인물들의 이야기는 성남·광주·하남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 민족정기와 한국사상의 지렛대로 자리매김

몽고족이 세계를 뒤흔들고, 우리 땅 고려에 쳐들어와 80년 가까이 우리를 괴롭혔던 침탈에 있어 광주군민 항전 이야기 또한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1231년 당시 광주부사 ‘이세화 묘지명’에서 ‘광주백성들은 오랑캐 군사들이 포위·공격했으나 능히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으니’라는 고종 임금 때 적장 살리타이 섬멸작전의 이야기가 ‘고려사’ 권80에 근거함으로써 이에 남한산성 일원의 광주·강동·강남·하남·성남 주변 지역이야말로 ‘나라 사랑’ 고장 중에도 영원히 빛날 호국의 성지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말 정치가이자 학자로 대표될 만한 성남 하대원동의 둔촌 이 집(1327~1387)선생을 비롯해 송산 조 견, 음촌 김약시의 은둔 이야기와 이지직·이병태·안 성·한계희·정 척·정성근·김종수 등의 청백리들이 남긴 선비정신, 조선역사와 일제 식민지 555년의 기간 중에 임진왜란에 순절한 곤지암의 신 립 장군 묘역, 분당 중앙공원의 이경류 선생 묘역, 정묘호란 때 남이흥, 이상안 무장들 순국 자취,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살신성인의 정신과 광주 쌍령리와 성남 험천(머내)에서 전사한 의로운 희생의 역사, 북벌운동의 주역인 백헌 이경석 선생의 애국사상, 한말 1천600여 명의 남한산성 의병부대의 결사항전의 정신, 독립만세운동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단합과 일사불란한 총궐기 이야기는 청사에 우뚝선 민족정기요, 한국사상의 지렛대와 같다고 하겠다.

대한제국 근현대사 안에서 항일 의병장 남상목·윤치장·구연영·구정서·임옥여·임백윤·안옥희 의병과 초지일관했던 의절로 일생을 다 바친 일제강점기의 3·1만세운동 애국자 한백봉·한순회·남태희·정제신·오수식·구희서·김교영·이대헌 등 시대별 큰 인물의 숨결, 해공 신익희 선생의 발자취 등이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남아 있어 이들 뜨거운 애국혼령의 흔적들은 광주문화권 향토역사의 뿌리가 된다.
또한 여기에 더해 문장가로서 금토동의 금릉 남공철, 광주의 상촌 신 흠, 그리고 여류문사로서 강정일당과 허난설헌 등 역사에 남는 문장가들이 줄을 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할 수 있는 실학의 발원지가 돼 성호 이 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과 같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배출됐고, 이들의 실사구시의 사상은 한말 개화사상가들인 오경석이나 유홍기(유대치) 등에게 전해졌다. ‘서유견문’을 지은 하남의 구당 유길준은 대표적인 개화사상가로 기록되고 있다. 하남의 최찬식(崔瓚植, 1881~1951)은 신소설 작가로서 신문학 개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작 ‘추월색’은 봉건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개화기의 새로운 애정윤리를 제시한 작품으로 당시에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읽혔고, 유진오(兪鎭午, 1906~1987)는 법학자이면서 문인 겸 정치가였는데, 1948년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광주문화권에는 지조있는 선비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박해의 순교자를 다수 배출해 한국 천주교 선교사에 있어 뚜렷한 획을 긋게 된다. 남한산성에서는 300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순교했고,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은 광주 일대에서 믿음생활을 하던 중 희생이 됐으니, 미사리의 구산성지에서는 김우집 등 일가족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광주의 천진암은 천주교 선교의 초기 유적이며, 청계산 자락

   
 
이나 율동공원, 광주 오포 신현리, 도척면 유정리 등지에는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은둔지의 지명유래가 여기저기에 전해온다.

 # 광주권 문화적 통합과 전승에 공동노력의 시발점이길…

지난 37회에 걸쳐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연재를 통해 남한산성이 품고 있는 웅대한 역사의 숨결을 이야기했는데, 지금까지의 연재 내용은 몇 줄기의 대강만을 이야기한 것일 뿐, 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이 고장에 전해오고 있다. 남한산성의 줄기를 따라 하남쪽으로 가다가 엄미리 골짜기 안에는 1398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의안대군 방석(宜安大君 芳碩)의 묘역이 경기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돼 있어 권력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고, 현재 서울로 편입된 지역에도 ‘삼전도비’를 비롯한 남한산성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지닌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기만 하다.

이제 광주문화권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에 대해 행정구역에 따라 복잡하게 분리돼 연구 관리될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관리되기를 바라면서 본인이 2006년 4월에 광주문화권협의회를 구성한 일도 옛 광주권의 문화적 통합과 합리적 연구·보존·전승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대한 출발점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