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에 즈음해

성남까치 2010. 3. 26. 10:52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

 

 

 

 

도움말=윤종준 성남문화원 상임연구위원

필자 약력 : ▶1965년 생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서현문화의집 관장

2010년 03월 25일 (목) 15:52:45 김대성 기자 sd1919@kihoilbo.co.kr

 

오늘부터 꼭 100년 전인 1910년 3월 26일 대한의 영웅 안중근(1879~1910년 3월 26일)의사는 32세의 젊은 나이로 이역만리 중국의 여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기차역에서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삼창했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 의사는 일본으로 신병이 넘겨져 불법적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안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사살했으며 전쟁포로로 국제법에 의한 정식 재판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안 의사를 일본형법에 의한 살인범으로 몰아갔다. 더구나 재판의 진행은 재판장을 비롯한 변호사까지도 모두 일본인으로만 배치하고 한국인 변호사는 물론, 러시아나 스페인 등 외국인 변호사의 변론조차 허용되지 않은 불공정 재판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남북 분단 그리고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체제와 북한의 핵문제 등 국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회에서,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남긴 평화주의 사상은 시대를 넘어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에 안중근 의사의 주요 활동과 사상 및 정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교육자이며 선각자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응칠(應七)이라 불렸다.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읽는 한편, 포수군들을 따라 사격술을 익혔다. 19세 때 빌렘 신부에게서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 눈을 떴다. 안 의사는 교육자, 언론인, 의병 장군이기도 했을 뿐 아니라 인도주의자였고 국제적 감각과 미래지향적 사상을 지닌 선각자였다.
안 의사가 뮈텔 주교에게 우리나라에 대학교 설립을 요청하니, 뮈텔은 학문이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한국은 아직 대학교육이 시기상조라 하면서 거절했다. 이에 안 의사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 1906년 진남포에서 개인이 흥하고(士興), 국민이 흥하고(民興), 나라가 흥해야(國興)한다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열었고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돈의학교 재정을 맡으면서 2대 교장에 취임했다. 이 무렵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했다.

이후 안 의사는 “학교 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며 무장 투쟁을 결심하고 연해주로 망명하니 이때 나이 29세다.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연해주에 도착한 안 의사는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 해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의군을 창설하고 안 의사는 참모중장으로 돼 독립특파대장의 직함으로 치열한 항일 투쟁을 시작하게 됐다.

그해 7월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함경도 경흥에서 일본 군경과 세 차례의 교전에서 50여 명을 사살하고 회령으로 진격해 3천여 명의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 교전했다. 이때 사로잡은 포로들을 국제 공법과 인도주의에 입각해 석방했으나 석방된 일본군에 의해 위치가 노출돼 곤란을 겪기도 했다.

연해주로 다시 돌아온 안중근 의사는 1909년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했다. 11명의 동지와 함께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조국의 독립 회복과 동양 평화 유지를 맹세했다.

   
 
연해주에서 안 의사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사’ 등 언론인으로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때 동료들은 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정보를 제공하고 거사를 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해 주게 됐다. 1909년 10월 초,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 의사는 우덕순 등 동지들과 함께 이등박문 처단을 도모했다. 마침내 10월 26일 9시 30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총살 응징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관으로서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얼빈 의거는 한민족의 기개를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고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민족독립운동의 불길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했다.

같은 해 11월 1일 안중근 의사는 일본총영사관에 인계돼 여순감옥에 수감됐고 일본 정부는 관동도독부 법원에 안 의사 ‘사형’을 지령했다. 법정에서 안중근은 이등박문의 죄목 15가지를 열거하며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해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진술했다.


#국제사회가 칭송한 기개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제6회(최종판결)이 개정됐고 재판장은 ‘이등을 살해한 살인죄’에 대해 일본 형법 제199조를 적용해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순에게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각각 징역 1년 6

   
 
개월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안중근 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말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한다.

안 의사가 이등박문을 총살한 뉴스는 우리 한민족의 정기가 살아 있어 독립의지가 확고함을 만방에 선포한 쾌거가 됐다. 그리하여 세계의 언론은 이에 대한 사실 보도와 아울러 논평과 추모의 시문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의 독립투사들과 문인, 학자들이 격찬의 시를 바친 것은 물론 중국의 원세개나 손문, 주은래와 장개석 등은 정치적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에 대한 숭모의 마음은 한결 같아서 송축시를 지어 추모하기도 했다.
중국의 양계초는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을 지었는데 “그 사나이 지척에서 발포하니, 정계의 거물이 피를 쏟았네. 대사를 마치자 웃음소리 터지니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 마냥 빛나리”라고 했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으리”라고 죽은 후까지도 안 의사를 숭모하겠노라는 마음을 나타냈다. 또 장태염은 안 의사를 ‘아시아의 제일의사’로 칭송했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했고 이어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3월 26일, 갑자기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안 의사는 전날 고향에서 어머니가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을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앞으로 한일 간에 화합해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길 바란다”며 함께 ‘동양평화만세’를 부를 것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유가족들에게 안 의사의 시신조차 인도하지 아니하고 어디엔가 암매장했으며 지난해에 현지 증언 등을 토대로 발굴을 했으나 찾지 못하는 한을 남겼다.

#현재진행형인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는 이미 100년 전에 미완의 원고인 ‘동양평화론’에서 오늘날 ‘유렵연합(EU)’이나 ‘국제개발은행(IBRD)’,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유사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제안하는 등 국제적 감각과 미래 지향적인 사상을 보여 줬다. 안 의사는 한·중·일 3국의 중간 지점인 중국 다롄에 3국이 동등한 자격으

   
 

로 참여하는 국제기구를 설치하고 각 국가가 회비를 갹출해 은행을 설립, 공용화폐를 발행·운영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열강의 침략에서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이 중요한데 한·청·일 3국이 각각 대표를 파견하되 각 나라 청년으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은 2개국 이상 언어를 배워 우방 혹은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당시 대동합방론, 아세아연대론, 흥아론(興亞論) 등을 내세우던 시기였지만 안 의사는 이런 자국·자민족 이기주의를 넘어 인류 공영과 자유, 평등 정신에 입각한 사상을 구현코자 했다.

이제 우리는 안 의사가 남긴 숭고한 평화사상을 계승·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얼빈시에는 ‘안중근 의사 전시실’이 2006년 7월 문을 열었고, 최근에는 여순감옥 부지 안에 안 의사를 비롯, 이곳에서 숨진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추모관과 전시관이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얻어 문을 열었다. 일제시대 때 안 의사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중국 등 11개국의 항일운동가들이 수감됐던 여순감옥을 중국 정부는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으로 명명,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를 하루빨리 찾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이 남아 있다 하겠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

   
 

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해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최후의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遺恨)이 없겠노라.” <동포에게 고함>

                                                                                                 정리=김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