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안중근 유적답사기=<8>미완(未完)의 옥중저술 '동양평화론'

성남까치 2009. 10. 26. 10:57

 

 

*국가안위노심초사 -국가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여순법원 검찰관 야스오카에게 써 준 것. 보물 제569-22호. 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장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상임연구위원
2009년 10월 25일 (일) 16:05:01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1909년 10월 26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우리 민족의 쾌거였으며,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체포돼 여순감옥으로 이송된 이후 속전속결로 강행된 재판에서 다음해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고, 항고를 포기한 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여순 감옥에 수감돼 있는 동안 영하 30° 이하로 내려가는 엄동설한에 벽돌로 쌓아진 비좁은 독방에서 머물면서 매우 바쁘고 경건한 나날을 보냈다.

천주교 신자로서 기도를 하는 한편, 가족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비롯해 자서전을 썼으며, 일본 정부의 독촉에 의해 사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또한 안 의사의 인품에 감동한 일본 헌병이나 간수들에게 붓글씨를 써주기도 했으니, 그 글씨들을 통해 안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에 대한 의사를 밝히니,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은 책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을 연기해 주기로 했으나, 3월 15일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하고 곧 이어 ‘동양평화론’을 쓰던 중 갑자기 사형을 당하게 돼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이다.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일본 침략 규탄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첫머리에서 ‘합성산패 만고정리(合成散敗 萬古定理)’라 해여 ‘합하면 이루고 흩어지면 패한다’고 하는 사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그 당시 국제정세는 서양 열강의 식민지 개척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동양에 있어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항상 이해관계가 상충했으니, 서로 합치면 이루지만 흩어지면 서양에 패해 모두 멸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開戰)하고 여순에서의 재판을 동양평화를 위한 ‘담판을 하는 자리’로 정했고, 이어서 동양평화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다고 했다.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일본 천황이 선전포고를 하면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운운했으니 이때에 청나라나 한국이 이 전쟁을 지지한 것은 바로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에 대한 약속이 지켜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동양평화, 한국독립의 단어에 이르러서는 이미 천하만국의 사람들이 금석(金石)처럼 믿었고, 한국과 청나라 양국 사람들의 간과 뇌(肝腦)에 도장 찍혀진 것이었다고 했다. 더구나 러일전쟁에서 한국과 청나라 사람들이 일치단결해 러시아편에 협조했더라면 일본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승리 이후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인종인 한국을 억압해 조약을 맺고, 만주 창춘(長春) 이남의 조차(租借)를 빙자해 전거하니, 세계 일반인의 머리 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이 주장한 내용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만행을 일삼은 러시아보다 더 심한 꼴을 보게 됐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일본이 동양의 평화를 깨트리고 가까운 이웃 나라와의 우의를 끊는다면 서양으로 하여금 어부지리를 취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에 ‘동양평화론’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전감(前鑑)’에서 청일전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쟁의 원인과 일본이 승리한 이유, 청이 패배한 이유를 분석했고,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쓰게 된 것은 일본이 청을 공격했기 때문에, 결국 제 도끼에 제 발등을 찍히는 격이라고 했다. 러일전쟁에 있어서도 한국과 중국이 합력해 일본에 대항했다면 일본이 이길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한국은 명성황후 시해와 같은 원수를 갚을 수도 있었을 것임을 언급하는 가운데 중국과 일본이 대항해 싸우게 되면 서양의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이 산동반도와 발해만에 군대를 집결시키게 되면 동양은 모두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파하고 있다. 또한 러일전쟁을 종결하면서 맺은 조약에 처음부터 한국은 관련이 없는데 일본이 우월권을 갖는다고 하는 내용이 들어간 것에 대한 부당성을 강하게 지적했다.

   
 
러시아가 동양의 중심지로서 여순을 빼앗고 또 이것을 일본이 빼앗고, 다시 언젠가는 중국이 도로 찾으려 할 것이니 동양 각국의 분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이곳을 동양 평화를 위한 영세 중림지대로 만들어 각 나라에서 파견하는 대표를 통해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장래의 발전과 평화를 도모할 것을 주장했다. 또 이 위원회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은 각 나라에서 일정한 비용을 갹출해 은행을 설치해 공동개발의 자금으로 쓰게 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케 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고등법원장에게 밝힌 안 의사의 이상과 안 의사의 미래정세 예견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의 면담 ‘청취서’에서 밝힌 안 의사의 이상(理想)을 보면, 첫째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해 3국 인민 중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재정확보는 1인당 회비 1원씩을 모금해 운영할 것. 둘째 3국이 공동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폐를 발행해 금융과 경제면에서 공동발전을 도모할 것. 셋째 각국의 중요한 지역에 평화회의 지부와 은행 지점을 개설해 재정적 안정을 도모할 것. 넷째 영세 중립지 여순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함 5~6척을 정박시켜 놓을 것, 다섯째 3국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해 최소한 2개 국어로 교육시켜 평화군을 양성할 것. 여섯째 한·중·일 세 나라의 상공업을 발전시켜 경제발전에 노력할 것. 일곱째 3국 황제가 국제적으로 신임을 얻기 위해 합동으로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대관을 받을 것. 끝으로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서 행한 침략만행을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규탄하는 한편, 이러한 침략전쟁은 반드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안중근 의사가 예측한 대로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 이어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1941년 12월, 대동아전쟁)을 일으켰고,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이어지는 국제정세가 전개됐다.

현대사회에서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15개 나라가 EU를 창설해 공동으로 경제, 사회, 안보 정책의 실행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1989년 11월에는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태평양 일대의 21개 나라들이 참가한 APEC이 발족했으니, 이러한 국제기구들은 이미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제안한 구상이 앞서간 것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민족정기는 대체로 자아도취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으나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통해 각 나라가 진정으로 공존공생하면서 발전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래서 우리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일본인들조차도 감동해 안 의사 앞에 무릎을 꿇고, 글씨를 받아 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
  =보물 제569-6호로 지정된 안중근의사 유묵(安重根義士遺墨), 부산 동아대 박문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