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독립투사 안중근 | ||||||||||||||||||||||||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사진 설명=블라디보스토크역은 1907년~1912년 코발로프에 의해 설계, 건설됐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시발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표적 건물이다. 러시아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이행해 설립된 이 역사(驛舍)가 극동에서 느끼는 수도로부터의 엄청난 거리감을 극복하게 하는 동시에 대강국 러시아의 옛 자존심을 대륙으로부터 쉬지 않고 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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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활동한 연해주 일대는 우리 한민족의 이민 역사가 있고, 항일운동의 역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신한촌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운이 기울어지자 국내외 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세워 국권회복의 결의를 다졌던 곳이다. # 연해주에 생겨난 한인촌과 슬픈 강제 이주 역사
1863년 연해주에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크라스키노 등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다. 1870년대에 8천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만2천 명까지 이르게 됐다. 1937년 스탈린은 이곳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신한촌도 사라지게 됐다.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을 기리기 위해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3개의 큰 기둥과 8개의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 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지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들이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었을 때 신한촌에는 비밀 아파트와 빨치산부대의 무기창고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몇 명의 일본군이 살해당한 후에 일본군들은 한국인 인질들을 잡고 루고바야 광장에서 총살했다. 1932년에 한국극장이 문을 열었고 1937년에 이르면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크, 그 밖의 다른 도시들에서 7개의 신문, 6개의 잡지, 많은 교과서와 문학 작품들이 출판됐으며 거의 400개에 이르는 초등학교, 사범대학, 기술대학, 노동자를 위한 야학, 도서관, 라디오방송국이 운영됐다.
# 대동공보사 기자가 된 안 의사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다가 일본군에게 오히려 패하게 됐고, 겨우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의병전쟁 이후 안 의사는 ‘대동공보사’의 기자가 돼 언론인으로서 독립투쟁을 전개한다. 대동공보사는 전신이 ‘해조신문’이었는데 그 무렵의 신문사 가운데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것이 다수 있어서 이역만리 연해주 땅에서도 애국혼을 빛낸 신문이 발행됐던 것이다. ‘해죠신문’, ‘해됴신문’이라는 표기도 있는데,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서 창간호를 발간하고 5월 26일까지 3개월 동안 총 75호를 간행했다.
해조신문은 국내로도 반입됐고, ‘황성신문’은 해조신문의 발간 취지를 실어 홍보했으며, 독자들에게 읽을 것을 권유했다. 이 때문에 일본 통감부에서는 해조신문의 발행을 금지했다. 언론역사에서 장지연, 신채호, 양기탁 같은 언론인들의 활약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 안중근 의사의 활동을 함께 기록할 수 있겠다. 안중근 의사는 해조신문에 1908년 3월 21일 ‘인심결합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의 요지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은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할 것은 자기가 자기를 단합하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집을 단합하는 것이요, 셋째는 자기 국가를 단합하는 것이니 그러한즉 사람마다 육신과 마음이 단합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오늘 이와 같은 참상에 처하게 된 것은 국민이 단합되지 못한 데 있다.”고 했다. # 대동공보사에서 특공대 결성 대동공보사는 안중근 의사를 철저히 지원했고, 안 의사는 촉탁 기자 신분으로서 재직 중에 이등박문을 처단했던 것이다.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에는 7명의 애국지사들이 모여서 시국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다. 명의상으로 사장은 러시아인 미하일로프였으나 실질적 사장 겸 총무인 유진율, 주필은 미국에서 안창호와 활동했던 정재관, 편집 주임 이강, 기자로는 윤일병·정순만·안중근과 집급 회계원인 우덕순의 7명이 우국충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사장부터 집금 회계원까지 모두가 우국지사로서 토론에 참여했던 것이다.
전격적으로 준비를 마친 특공대는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수분하에 내려 유동하를 만나 그를 통역으로 삼고 동행해 세 사람은 10월 22일 오후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들은 10월 22일부터 삼림가 28호에 있는 하얼빈 한인 국민회 회장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했고 다음날인 10월 23일 하얼빈 공원에서 의거방안을 상의하고, 공원 남문 밖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을 때 알게 된 조도선을 ‘도리’에서 찾았으며 그의 소개로 동흥학교에 가서 교장, 교원들과 담화했다. 하얼빈 공원은 현재 이름이 바뀌어 ‘조린공원’이라고 부르고, 도리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행사를 전개하고 있다.
사나이 큰 뜻 품고 타국으로 떠나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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