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해외독립투쟁유적답사기-3<연해주 떠나 운염의 하얼빈에 서다>

성남까치 2009. 9. 21. 10:33

언론인 독립투사 안중근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사진 설명=블라디보스토크역은 1907년~1912년 코발로프에 의해 설계, 건설됐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시발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표적 건물이다. 러시아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이행해 설립된 이 역사(驛舍)가 극동에서 느끼는 수도로부터의 엄청난 거리감을 극복하게 하는 동시에 대강국 러시아의 옛 자존심을 대륙으로부터 쉬지 않고 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9년 09월 20일 (일) 15:52:38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안중근 의사가 활동한 연해주 일대는 우리 한민족의 이민 역사가 있고, 항일운동의 역사가 스며있는 곳이다. 신한촌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운이 기울어지자 국내외 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세워 국권회복의 결의를 다졌던 곳이다.

    # 연해주에 생겨난 한인촌과 슬픈 강제 이주 역사

   
 

 
1863년 연해주에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크라스키노 등 하산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다. 1870년대에 8천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만2천 명까지 이르게 됐다. 1937년 스탈린은 이곳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신한촌도 사라지게 됐다.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을 기리기 위해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3개의 큰 기둥과 8개의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 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지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들이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었을 때 신한촌에는 비밀 아파트와 빨치산부대의 무기창고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몇 명의 일본군이 살해당한 후에 일본군들은 한국인 인질들을 잡고 루고바야 광장에서 총살했다. 1932년에 한국극장이 문을 열었고 1937년에 이르면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크, 그 밖의 다른 도시들에서 7개의 신문, 6개의 잡지, 많은 교과서와 문학 작품들이 출판됐으며 거의 400개에 이르는 초등학교, 사범대학, 기술대학, 노동자를 위한 야학, 도서관, 라디오방송국이 운영됐다.

   
 거사직전에 찍은 사진(왼쪽부터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이처럼 조선 민족은 근면하게 삶터를 일구고 있었는데, 1936년에 소련과 일본 간에 직접적인 무력충돌이 있었다. 이 사건은 국경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는 바,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다. 한인들의 강제 이주에 관한 비밀문서는 소련 육군참모본부와 태평양함대가 1936년 말 강제이주를 계획했고, 1937년 8월 20일 소련내무인민위원회의 에조프가 초기 강제이주 명령을 내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강제이주는 1937년 9월 1일부터 25일까지, 9월 26일부터 10월 15일까지 2차에 걸쳐 진행됐고, 극동지역으로부터 12만 명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고, 강제이주 과정에서 2만5천 명의 한인들이 탄압당했다.

 # 대동공보사 기자가 된 안 의사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다가 일본군에게 오히려 패하게 됐고, 겨우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의병전쟁 이후 안 의사는 ‘대동공보사’의 기자가 돼 언론인으로서 독립투쟁을 전개한다. 대동공보사는 전신이 ‘해조신문’이었는데 그 무렵의 신문사 가운데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된 것이 다수 있어서 이역만리 연해주 땅에서도 애국혼을 빛낸 신문이 발행됐던 것이다. ‘해죠신문’, ‘해됴신문’이라는 표기도 있는데,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서 창간호를 발간하고 5월 26일까지 3개월 동안 총 75호를 간행했다.
해조신문이라는 이름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만든 신문’이라는 의미다. 해조신문의 발간 목적은 국권의 회복과 동포의 구제를 내걸었다. 해삼위에서 신민회 지부 활동을 하던 이강 등이 주도해 발행했고,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대한자강회 출신의 장지연이 초빙을 받아 주필을 맡기도 했다. 러시아 거주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비록 발행 기간은 짧았으나, 러시아 지역 조선인의 민족운동에 정신적 힘을 주었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대한학회월보’를 간행했는데, 여기에 해조신문 창간을 축하하는 축사가 실리고, 미국의 ‘공립신보’도 축하 기사를 게재했을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해조신문은 국내로도 반입됐고, ‘황성신문’은 해조신문의 발간 취지를 실어 홍보했으며, 독자들에게 읽을 것을 권유했다. 이 때문에 일본 통감부에서는 해조신문의 발행을 금지했다. 언론역사에서 장지연, 신채호, 양기탁 같은 언론인들의 활약이 기록에 남아 있는데 여기에 안중근 의사의 활동을 함께 기록할 수 있겠다. 안중근 의사는 해조신문에 1908년 3월 21일 ‘인심결합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의 요지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은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할 것은 자기가 자기를 단합하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집을 단합하는 것이요, 셋째는 자기 국가를 단합하는 것이니 그러한즉 사람마다 육신과 마음이 단합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오늘 이와 같은 참상에 처하게 된 것은 국민이 단합되지 못한 데 있다.”고 했다.

   # 대동공보사에서 특공대 결성

대동공보사는 안중근 의사를 철저히 지원했고, 안 의사는 촉탁 기자 신분으로서 재직 중에 이등박문을 처단했던 것이다.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에는 7명의 애국지사들이 모여서 시국 문제로 토론이 벌어졌다. 명의상으로 사장은 러시아인 미하일로프였으나 실질적 사장 겸 총무인 유진율, 주필은 미국에서 안창호와 활동했던 정재관, 편집 주임 이강, 기자로는 윤일병·정순만·안중근과 집급 회계원인 우덕순의 7명이 우국충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사장부터 집금 회계원까지 모두가 우국지사로서 토론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 자리는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가 입수됨으로써 긴급하게 마련된 것이었다. 하얼빈에서 발행되는 ‘원동보(遠東報)’에 동경 특전으로 이등박문이 10월 하순 하얼빈에 온다는 기사가 실렸고,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은 연추에 있던 안중근에게 “속히 오라”는 전보를 쳤던 것이다. 이등박문의 처단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 안중근은 이번 기회에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고자 결심해 자원했고, 우덕순이 여기에 동참해 그 자리에서 특공대가 결성됐다. 안중근이 특공대장, 우덕순이 공동 실행자, 하얼빈에 파견된 조도선과 안중근의 친지인 유동하가 러시아어 통역이 돼 구성됐다. 유진율과 양성춘은 거사용 무기 구입, 김

   
 
성무는 이등박문의 사진 3장 입수, 윤효능은 여비 200원 마련 등 그 자리에 없던 인사들까지 동참했다.
전격적으로 준비를 마친 특공대는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수분하에 내려 유동하를 만나 그를 통역으로 삼고 동행해 세 사람은 10월 22일 오후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들은 10월 22일부터 삼림가 28호에 있는 하얼빈 한인 국민회 회장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했고 다음날인 10월 23일 하얼빈 공원에서 의거방안을 상의하고, 공원 남문 밖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을 때 알게 된 조도선을 ‘도리’에서 찾았으며 그의 소개로 동흥학교에 가서 교장, 교원들과 담화했다. 하얼빈 공원은 현재 이름이 바뀌어 ‘조린공원’이라고 부르고, 도리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행사를 전개하고 있다.  

 

 
※ 왼쪽 사진 설명-하얼빈 도리 조선족 중심 소학교 벽에 걸려있는 족자=안중근 의사가 거사 직전 ‘하얼빈 도리 조선족 중심 소학교’를 다녀갔다. 이 학교는 바로 1909년 개교했고, 안 의사 의거 100주년과 같은 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안 의사 기념행사를 개최했고, 아래 글씨는 안 의사가 남긴 어록을 어린이가 쓴 것이다.

 

사나이 큰 뜻 품고 타국으로 떠나가니
살아서 성공 못하면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
유골을 구태여 선조의 무덤옆에 묻으랴
세상엔 가는 곳마다 청산이 무진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