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답사기1

성남까치 2009. 8. 31. 12:46

안중근 의사 독립투쟁 유적 답사기-1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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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 ▶1965년 생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전 하남문화원 사무국장


나는 지난 7월 9일부터 17일까지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추진한 ‘제5기 대학생 안중근의사 해외 독립

   
 
   
 
투쟁지 탐방단’에 참가해 단지동맹비 참배를 시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역, 여순감옥 등 안중근 의사와 애국지사들이 투쟁했던 길을 따라가 보았다. 하얼빈(哈爾濱)시에는 ‘안중근 의사 전시실’이 2006년 7월 문을 열었고, 최근에는 여순감옥 부지 안에 안 의사를 비롯, 이곳에서 숨진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추모관과 전시관이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얻어 문을 열었다. 그 동안 일제시대 때 안 의사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중국 등 11개국의 항일 운동가들이 수감됐던 여순감옥을 중국 정부는 ‘뤼순 일아(日俄) 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으로 명명, 항일운동의 주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 왔지만 그 동안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불허해 왔다.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남북 분단 그리고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체제와 북한의 핵문제 등 국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회에서,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남긴 평화주의 사상은 퇴색됨이 없이 날이 갈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새삼 알 수 있었다.

# 안중근(安重根 : 1879~1910. 3. 26)의사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최후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삼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遺恨)이 없겠노라.” (동포에게 고함)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기차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최악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했다. 안중근 장군은 이등박문을 사살한 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러시아어로 삼창했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일본으로 신병이 넘겨졌고 이후 편파적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다음 해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99주년이면서 이등박문 사살 100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군을 사살한 것이었고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에 의한 재판을 요구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안중근 의사를 살인범으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더구나 재판의 진행은 재판장을 비롯해 변호인까지도 모두 일본인으로만 배치했고, 한국인 변호사는 물론, 러시아나 스페인 등 외국인 변호사의 변론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 프랑스어 배워 새 사상과 문화에 눈 떠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했다. 본관이 순흥으로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26대손이다. 안 의사는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읽는 한편, 포수군들을 따라 사격술을 익히고 사냥을 즐겼다. 19세 때 빌렘 신부에게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 눈을 떴다.

안중근 의사는 구국의 영재를 양성한 교육자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였다. 언론인이기도 했으며, 의병을 일으킨 장군이기도 하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인도주의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국제적 감각과 미래지향적 사상을 지닌 선각자였다.

안 의사는 뮈텔 주교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교 설립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06년 28세 되던 해에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열었고, 프랑스 신부가 경영하던 천주교 계통의 돈의학교 재정을 맡으면서 2대 교장에 취임했다.

이 무렵 서우학회(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가입했으며, 삼흥학교는 개인이 흥하고(士興), 국민이 흥하고(民興), 나라가 흥해야(國興)한다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08년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조직해 국내진공작전을 벌였고, 이 작전에서 생포한 일본군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거 석방하면서 무기까지 내줬다. 이 때문에 일본군에게 위치가 노출돼 기습공격을 받고 회령 영산에서 일군과 약 4~5시간 큰 접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했다.

  # 안 의사 국제기구 설립 제안

   
 

안중근 의사는 이미 100년 전에 미완의 원고인 ‘동양평화론’에서 오늘날 ‘유럽연합(EU)’이나 ‘국제개발은행(IBRD)’,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유사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제안하는 등 국제적 감각과 미래지향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안 의사는 한·중·일 3국의 중간 지점인 중국 다롄(大連)에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국제기구를 설치하고, 각 국가가 회비를 갹출해 은행을 설립해 공용화폐를 발행해 운영하는 게 옳다고 보았다.

또한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장이 중요한데 한·청·일 3국이 각각 대표를 파견하되 나라 청년으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은 2개국 이상 언어를 배워 우방 혹은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당시 대동합방론, 아세아연대론, 흥아론(興亞論) 등을 내세우던 시기였으나, 안중근 의사는 이런 자국·자민족 이기주의를 넘어 인류 공영과 자유·평등 정신에 입각한 사상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