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독립투쟁 유적 답사기-1 |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 ||||||||||||||||||||||||||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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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 침략과 남북 분단 그리고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체제와 북한의 핵문제 등 국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회에서,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남긴 평화주의 사상은 퇴색됨이 없이 날이 갈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새삼 알 수 있었다. # 안중근(安重根 : 1879~1910. 3. 26)의사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최후 유언)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삼년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遺恨)이 없겠노라.” (동포에게 고함)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기차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최악의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했다. 안중근 장군은 이등박문을 사살한 후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러시아어로 삼창했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일본으로 신병이 넘겨졌고 이후 편파적으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다음 해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군을 사살한 것이었고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에 의한 재판을 요구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안중근 의사를 살인범으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더구나 재판의 진행은 재판장을 비롯해 변호인까지도 모두 일본인으로만 배치했고, 한국인 변호사는 물론, 러시아나 스페인 등 외국인 변호사의 변론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 프랑스어 배워 새 사상과 문화에 눈 떠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배와 가슴에 북두칠성 모양의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해서 아명을 ‘응칠’이라 했다. 본관이 순흥으로 고려 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26대손이다. 안 의사는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조선사, 만국역사 등을 읽는 한편, 포수군들을 따라 사격술을 익히고 사냥을 즐겼다. 19세 때 빌렘 신부에게 토마스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 눈을 떴다. # 안 의사 국제기구 설립 제안
안중근 의사는 이미 100년 전에 미완의 원고인 ‘동양평화론’에서 오늘날 ‘유럽연합(EU)’이나 ‘국제개발은행(IBRD)’,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유사한 국제기구의 설립을 제안하는 등 국제적 감각과 미래지향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안 의사는 한·중·일 3국의 중간 지점인 중국 다롄(大連)에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국제기구를 설치하고, 각 국가가 회비를 갹출해 은행을 설립해 공용화폐를 발행해 운영하는 게 옳다고 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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