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강사를 하던 시절, 개인적인 사정(?)으로 근 10년에 걸쳐 여름과 겨울방학을 내내 일본에서 보냈던 적이 있다. 일본 중부지방 교통의 요충지인 나고야(名古屋)시에서 전철로 30분쯤 거리에 있는 인구 33만 명 정도의, 농촌과 도시가 공존하는 오카자키(岡崎)라는 작은 도시였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일본의 전형적인 농촌이려니 했고, 가끔 도시 중심가를 이곳 저곳 구경하다가 낮시간대의 거리에 도통 사람이 없어 경제적으로 안정된 마을이구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하나비 마쯔리(불꽃축제)’라고 부르는 지역의 축제날에 전통복장을 하고 모여든 사람들의 무리를 보면서 이 도시 어디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나 놀라고 신기해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 그들의 질서의식은 이미 잘 알고 있던 터라 새삼 놀랄 것은 없었지만, 공원에 마련된 홍보용 전광판을 멀리 마주하고 각자의 지정석에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식구들과 먹으면서 오직(?) 불꽃만을 감상하는 그 조용함에(?), 축제라면 시끌벅적한 프로그램만 생각했던 나로서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행사에는 지역유지의 형식적인 인사말도 없고 유명 가수나 연예인들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냥 불꽃을 보면서 도란도란 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불꽃놀이가 끝나자 자신들이 먹은 도시락과 주변을 정리하고 질서있게 흩어져 갔다. 단지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 외에 흔히 예상되듯 차들로 도로가 뒤엉키지도, 나뒹구는 쓰레기 때문에 기분상할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축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탄생 450주년을 기념한 행사였고, 지금까지 매년 해오던 그대로 진행된 지역인들의 결집의 자리라는 것이다.
정작 더 놀랐던 것은 이들이 가진 문화유산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지금껏 이를 간직하고 보살펴온 자연스러운 자세 때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작고 평범한 시골도시였지만, 오늘날 일본 무사정권의 전형이라 불리는 에도막부(江戶幕府)시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생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에 이 도시를 유심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발지가 되었던 이 지역은 옛부터 면포(三河綿布)의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재는 화학섬유·자동차부품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지역 특산물로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과 석등, 도쿠가와의 화약비법을 이어받은 장난감불꽃,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된장, 숯 등이 유명하다.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해 철도(東海道鐵道) 건설 때 지역을 관통하지 못하도록 역 설치를 반대해 국철 오카자키역은 도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3㎞나 떨어져 있다.
이들 자부심의 근원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생지라는 역사성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가 활약한 시대는 우리 역사로 보면 조선시대 중엽에 해당하는데,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우리 역사에 등장했던 몇 몇 인물들과 관련되어 거론되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연합해 나고야일대 미카와(三河)를 평정하고(156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천하통일을 도왔으며 1603년 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에도시대를 열었던 장본인이었다. 이른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중세시대 통일을 이룩한 역사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지만 그들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세는 결코 요란스럽거나 호들갑스럽지 않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근거지가 되었던 오카자키성(岡崎城)의 자연스러운 관리는 물론, 그 일대 공원에 조성된 역사전시관에는 가마쿠라(鎌倉)막부(1192~1333)로부터 에도막부(1603~1867)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역사와 자료가 잘 정리·전시되어 주민들을 위한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또 도쿠가와 집안의 원찰이었던 사찰(大壽寺)은 도쿠가와와 그 자손들의 묘가 잘 보존되어 지역인들이 수시로 들러 참배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었다.
문화유산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정착시키다 보니 일회성의 전시적인 행사도 없고 또 보존에 요란스럽지도(?)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 대대손손 이어가는 그들의 평범한(?) 자세는 오늘, 우리 인천이 도시엑스포와 아시안게임 개최를 두고 '역사도시 인천'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각별한(?) 시각으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