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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현절사(顯節祠)와 삼학사 (三學士)

성남까치 2009. 6. 2. 13:09

[9] 현절사(顯節祠)와 삼학사 (三學士)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현절사=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4호(1972년 5월 4일 지정)
  소 재 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310-1
  현절사 제향의궤 : 광주시 향토무형문화재 제2호

현절사(顯節祠)는 청나라와의 화친을 끝까지 반대하며 싸울 것을 주장하다 선양(瀋陽)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688년(숙종 14) 삼학사 세 충신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유수 이세백(李世白)이 세웠고, 1693년 봄에 현절사라 이름했다. 그 후 주전파(主戰派)의 거두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두 충신도 함께 모시고 있다.

 

     홍익한 친필

   윤집 친필

   오달제 친필 

 

 

 

삼학사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삼학사는 1671년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지으면서 이들 세 분을 삼학사라고 부르게 됐다. 이들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전쟁의 주범으로 지목돼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선양 서문 밖에서 처형당함으로써 당당하게 나라와 대의명분을 위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윤집과 오달제는 용골대의 심문을 받으면서 “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더 이상 다른 말을 말라”고 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자, 두 학사는 결박돼 끌려 나가면서도 오히려 되돌아보면서 용골대에게 호통을 치니 재신(宰臣)들이 나와서 보고는 서로 말하기를, “참으로 만 마리의 소를 가지고도 끌어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고 했다.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의 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 시호는 충정(忠正). 선양에 잡혀가서 용골대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청 태종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당당하게 대의를 주장하다가 처형당하면서도 “내 피를 북에다 발라서 친다면 내 넋은 하늘로 날아 고국으로 갈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밖에는 다시 할 말이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저서에 <화포집>, <북행록(北行錄)>, <서정록(西征錄)> 등이 있다. 
윤집(尹集, 1606~1637)의 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2세에 생원이 되고,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 1636년(인조 14) 이조정랑·교리(校理)가 됐다. 영의정에 추증됐다.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의 본관은 해주.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9세 때 사마시 합격,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전적·병조좌랑·사서(司書) 등을 거쳐 1635년 정언·지평이 되고, 1636년 수찬(修撰)을 거쳐 부교리가 됐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현절사를 비롯해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彰烈)서원에 배향됐다. 문집에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후일에 추가로 배향된 정온(鄭蘊, 1569~1641)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 휘원(輝遠). 호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 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면서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화의가 이뤄지자 사직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해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했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했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의 학가산에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했다가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돼 1641년 선양(瀋陽)에 끌려가 4년여 동안 청에 묶여 있었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삼학사의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조선 정부는 이들의 순절을 애통해 하면서 유가족들의 생계를 돌보고 관직도 주었으나, 삼학사를 현창하는 데에는 청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던 중 1661년(현종 2)에 평택의 홍익한 허장묘(虛葬墓) 앞에 사당을 짓고 삼학사의 위패를 모신 것이 삼학사에 대한 제향의 시작이 됐다.

풍기군수 어상준(魚相儁)이 1668년 세 신하의 사당 건립을 건의하고, 다음 해에 송시열이 삼학사의 절의에 대해 표창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실정이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1681년(숙종7) 1월 30일 시강관(侍講官) 조지겸(造持謙)이 말하기를, “병자년의 변란 때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당초 척화를 주장한 신하들을 찾으므로 조정에서 부득이 세 신하를 보냈었습니다. 그 날, 인조께서는 그들이 가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술을 내리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유시(諭示)하시기를,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는 내가 마땅히 무휼(撫恤)하겠다’ 하셨습니다. 그 후 조정에서 그 자손에게 모두 벼슬을 주었으나 세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요사(夭死)하고 차차 몰락하였습니다. 가난하여 의탁할 데가 없으니, 몹시 가엾고 불쌍합니다”하고, 후손들을 잘 돌봐 줄 것을 건의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달제 등 3인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의리를 지켜 순절하면서 사지(死地)에 나아가기를 낙토(樂土)에 나아가는 것같이 하고, 마침내 이역(異域)에서 운명하는 데 이르렀으나, 또 어느 땅에서 죽었는 지도 알지 못하였으니, 더욱 불쌍하고도 가엾다. 해조(該曹)에 말하여 그 자손을 수록(收錄)하도록 하고, 식물(食物)도 제급(題給)하도록 하라”고 했다.
승지 이사명(李師命)이 특별히 남한산성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과 의논해 처리하도록 했다. 대신들이 모두 옳게 여기니, 마침내 사당을 세우고 이름을 현절(顯節)이라 했다.

그런데 이 무렵 흉년이 들고 추위로 인해 연기됐다가 1688년(숙종 14)에 이르러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여주 능행길에 임금을 모시던 중 다시 건의해 그 해 5월 광주유수 이세백이 <삼신사(三臣祠)>를 건립했고, 숙종 25년에 와서 <현절사>라 이름해 사액했다.

이때 <현절>이라는 사당의 명칭은 예문관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지었고, 편액의 글씨는 영의정 남구만의 친필이다. 제문은 지제교 조지겸이 지었는데 제문일부는 다음과 같다.

한 칸의 사당을 세워 / 만고의 풍성(風聲)으로 삼겠습니다.

맑고 아름다운 거동을 대한 듯 / 분한 마음 살아 계실 때와 같습니다.

생각은 오직 충성심 뿐이었으니 / 세상 현실에서는 보기 드문 일입니다.

이런 아픔을 당하는 것은 / 예전에 또한 없었던 일입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꿈속이런가 / 고향에 돌아가고픈 가련한 마음
변방에 떠도는 영혼들은 / 후세에 누가 칭찬하여 전하오리까
옛날엔 슬프고 이제는 마음이 상하는구려 /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멥니다.

영령이시여, 이 조그마한 사당이오나 내림하시어 / 영원히 아름다운 제향 받으시옵소서

그 후 숙종 25년(1699) 김상헌과 정온을 현절사에 추가로 배향하게 됐고, 1701년(숙종 27)에는 개원사 올라가는 길 옆에 있던 <삼신사>의 위치가 습해 목조 건물의 유지가 어려우므로 양지바른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는 광주 선비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711년(숙종 37)에 공조(工曹)의 예산을 긴급 지원해 현재의 위치에 새로 짓게 됐다.

1721년 7월 숙종 임금이 돌아가시기 직전, 3월에 임금이 친히 지은 시문을 새겨 현절사 본전 안쪽 벽에 붙였으니, 그 시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슬프도다 삼학사여, 늠름한 그 절의(節義) / 오로지 황조(皇朝)가 있음만을 알았기에
힘을 다해 오랑캐와 화친을 배척했네 / 하직 인사말에서도 충성은 더 더욱 참되었고,
죽을 고비에 임해서도 그 듯 더욱 굳건했도다. / 옛 사우(祠宇)를 다시 고쳐 짓고 빛내려 함에 / 그대들 돌이켜 생각하니 감회가 실로 많도다.

 
삼학사의 애국정신은 죽음을 뛰어 넘어 대의를 위해 용맹과 절의를 보여 준 우리 민족의 귀감이면서 우리의 자랑일 것이다.

죽음보다 더 두려워 한 것이 불의였던 이들 삼학사의 충절은 오늘 이 시대의 온 국민에게도 다시 되새기고 본받아야 할 역사 이야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