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렬전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2호 지정연도 1972년 5월 4일 소 재 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717

○ 침괘정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5호 지정연도 1972년 5월 4일 소 재 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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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시조 온조가 어디에 도읍을 정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 광주 고읍(古邑 : 현재 하남시 고골)이라는 설과 하남의 이성산성, 또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충남의 직산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도 도읍설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남한산성도 예외 없이 주목을 받아 왔는데, 일단 여기서는 도읍의 위치에 대한 논의보다는 남한산성에서 온조대왕과 관련된 숭렬전과 침괘정에 얽힌 사연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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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렬전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과거의 역대 왕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三聖祠)를 비롯해 숭의전(崇義殿), 숭령전(崇靈殿), 숭인전(崇仁殿), 숭덕전(崇德殿) 등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 숭렬전은 ‘온조왕묘(溫祚王廟)’로 건립됐다. 조선 초기에는 충청도 직산에 있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불태워 없어지고, 인조 때 남한산성으로 옮겨오게 됐다. 온조왕 사당이 남한산성으로 옮겨 오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온조왕이 인조 임금의 꿈에 나타나 적의 침입을 알려주어 승리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대왕이 기해년에 남한산성에 들러서 군사 훈련을 살필 때 이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다.
정조대왕이 서장대에 나아가 성조(城操)를 행했는데, 대신들과 수어사에게 묻기를, “병자년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 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 하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때 인조 대왕께서 꿈에 온조왕이 와서 적병이 성에 오른다고 알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조(聖祖)께서 놀라 깨어 곧 명하여 정탐하게 하셨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아서 장사(將士)를 시켜 격퇴하게 하셨는데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으므로, 환도(還都)한 날에 특별히 명하여 온조묘(溫祚廟)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하게 하셨으니, 일이 매우 영이(靈異)합니다.”했다. 1638년(인조 16) 7월에 우레가 행궁을 뒤흔들었는데 그 해 겨울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을 세우고 완풍군 이서를 배속했으니 이서가 성을 쌓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1637년(인조 15) 1월 2일 이서가 군중(軍中)에서 죽으니 임금이 그를 위해 통곡했는데 곡성이 밖에까지 들렸다. 의복과 명주를 하사해 염습하게 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했으며, 도성에 돌아온 뒤에는 빈소를 그 집안에 들이도록 특별히 명했다. 그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감독해 완성시키고 군자(軍資)와 기계(器械)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는 대가가 머물면서 의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게 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溫王廟)를 세워 이서를 배향하도록 명했다.
또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인조 임금의 꿈속에 온조왕이 나타나서 신하 한 사람을 배정해 주기를 요청했는데, 그 다음 날 이서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인조임금의 꿈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나타나고 있는데, 인조 임금은 옛날 온조의 힘을 빌려서라도 나라를 지켜내고자 하는 염원이 간절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639년(인조 17) 2월 2일에 사당이 완공됐고, ‘백제 시조왕(百濟始祖王)’이란 위판을 만들게 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사서(史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모두 온조왕(溫祚王)으로 썼는데, 세대가 멀어져서 명호 및 시호를 분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 나라의 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거해 위판에 쓰자고 했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온조는 이름인 듯한데, 위판에 바로 쓰는 것이 어떠할지?”했다. 예조가 ‘백제 시조(百濟始祖)’라고 쓰기를 청하니, 상이 ‘왕(王)’자를 더 써 넣도록 명했다.
현재 숭렬전에 모셔진 위패는 <백제시조온조왕 신위(百濟始祖溫祚王 神位)>라 쓰여져 있는데 함께 배향된 이서(李曙)의 위패는 모셔져 있지 않다. 숭렬전을 처음 세울 때의 정신을 살려 이서 장군의 위패도 복원돼야 할 것으로 믿는다.
1795년(정조 19) 9월 18일에 광주 판관(廣州判官) 이시원(李始源)의 건의를 받아 들여 백제 시조의 묘호를 <숭렬전(崇烈殿)>이라 정하고 편액을 다는 날에는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내려주었다. 전감(殿監) 2인과 수복(守僕) 2인을 배치했다.
숭렬전에 배치된 관리는 지위와 문벌도 있는 사람을 영문(營門)에서 차출해 복색은 모자와 띠를 갖추게 하고, 입직 수복은 붉은 옷을 입고 건을 쓰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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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대왕이 하교하기를, “역대 후왕(后王)을 제사 지내는 곳에는 모두 부르는 이름이 있으니,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과 동명왕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전호(殿號)가 없다니 이는 흠이 되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공사(公私) 간의 문적(文跡)에 이름을 가지고 임시로 일컫는 것은 외람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그런 줄 안 이상에는 즉시 바로잡아 고쳐야 마땅하니, 숭렬전이라는 칭호로 문헌비고와 대전통편, 오례의 등 책을 즉시 세보개정(洗補改正)토록 하라. 그리고 마침 연석(筵席)에서 하교하는 일이 있게 됐으니, 숭렬전의 편액은 대신에게 명하여 쓰도록 하고, 현판을 거는 날에는 수신(守臣)을 보내어 제사지내 주도록 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짓겠다.”했다.
제문 몇 구절을 인용해 둔다.
산천이 기운을 더하고 / 초목이 빛을 내도다. / 억년에도 만년에도 /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 우리에게 수(壽)와 복(福)을 내려서 / 바다는 편안하고 시내는 맑네. / 무엇으로 보답하리오. / 살찐 희생과 향기로운 단술이로다.
# 침괘정 남한산성 안에 온조와 관련된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 ‘침괘정(枕戈亭)’이다.
침괘정은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침괘정’이라 이름하고 편액을 붙였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편액조차도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침괘정 이름을 지은 뜻은 곧 ‘창을 베고 누워 편히 자지 못 한다’는 뜻으로 잠을 못 이루면서까지 군국(軍國)의 일을 염려하는 자세를 깨우치고자 하는 말이다.
중국의 역사서인 <진서(晋書)권62 유곤전(劉琨傳)>의 기록에 유곤(劉琨)이 그 친구인 조적에게 보낸 글이 나오는 데 “내가 창을 베고 밤새도록 역로(逆虜)를 효수(梟首)할 생각을 한다”고 했다.
‘침괘(枕戈)’는 또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와 함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기진이 침괘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데에는 효종 때 북벌(北伐)을 준비하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름 붙인 것 같다.
이 건물 터는 오랜 세월 사용되지 않다가 완풍군 이서(完豊君 李曙)가 성을 쌓을 때 숲 속에서 옛날 집 한 채를 찾아내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견 당시에는 몇백 년이나 됐는지 알 길이 없는 옛 건물이었으나 기둥과 주춧돌이 모두 견고했다. 방의 구들도 상하지 않았는데, 가운데의 한 칸은 온돌을 높게 해 수 척이 됐고, 부엌에 불을 때니 높은 곳이 먼저 따뜻해지면서 차츰 아랫목으로 퍼져 나갔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온조의 왕궁’이라고 했다.
마침내 각(閣)의 오른 쪽에 군기고(軍器庫)를 세우고 명나라 조사(詔使)인 부총병 정룡(程龍)이 현판에 쓰기를 ‘총융무고(摠戎武庫)’라 하고 아래에 ‘숭정 갑술 월 일’(인조12년, 1634)이라고 썼다. 정룡은 그림도 잘 그렸는데, 난초 몇 떨기를 벽에 그렸더니 마치 살아있는 듯 유동(流動)했고, 군기고 벽에 용을 그리자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고 운기(雲氣)가 항상 그 사이에서 나와 멀리서 보면 날아 움직이는 기세가 있어 간혹, 비가 오기를 빌면 응답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화란가(畵蘭歌)>를 지었는데 이곳을 불사(佛寺)라고 했고, 정룡이 그렸다고 하는 난초나 용 그림은 이미 1779년 정조대왕의 기해주필 때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됐다.
1800년대 후반에 이유원 또한 그의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침괘정(枕戈亭)이 백제의 고찰(古刹)로서 가시덤불 속에서 찾아냈다고 하고, “대들보 위의 용 그림이 가장 영험하여 때때로 운무(雲霧)를 뿜어냈는데, 중수할 때 다시 채색을 하자 다시는 영험이 없게 됐다. 내가 화법(畵法)을 보니 과연 신기했지만, 운무를 뿜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 차례 중수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 군사가 행궁이 내려다 보이는 한봉(汗峰)에 올라가 대포를 쏘면 탄환이 행궁의 기둥에까지 날아와서 위태로운 지경이었으므로 인조가 이곳 침괘정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침괘정은 유수 이기진의 뒤를 이어 몇년 후에 부임한 김희순(金羲淳)이 침괘정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에 “적국과 외환이 항상 뜰에 있는 것처럼 여겨, 성곽의 하자를 보면 완전히 할 방법을 생각하고, 군량이 빈 것을 보면 채울 방법을 생각하고, 군대의 사기가 부진한 것을 보면 고무(鼓舞)하고 격려하여 분발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것처럼 유비무환의 교훈을 일깨워주는 문화유산의 현장이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7편에서는 남한행궁에 대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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