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5)청량당(淸凉堂)과 매바위 전설

성남까치 2009. 5. 7. 16:32

(5)청량당(淸凉堂)과 매바위 전설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청량당>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정연도 - 1972년 5월 4일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2
시    대 - 조선시대

 

 청량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공을 세운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 및 벽암선사를 모신 사당이다.
본당의 정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고 좌·우편에는 각각 벽암선사(碧岩禪師 : 1575∼1660)와 이회의 부인 송씨, 소실인 유씨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원래 있었던 초상화는 6·25전쟁 때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그 뒤 새로 그려서 모신 것이다. 그리고 무속신으로 백마신장, 오방신장, 군웅장군, 마부도 및 매바위 전설과 관련된 매그림 등이 모셔져 있다.


 # 참수당한 이회·한강에 몸던진 부인 송씨

 

 
 

1624년(인조 2)부터 2년 여에 걸쳐 산성을 쌓을 때총책임자는 이서(李曙 : 1580~1637)였고, 그를 중심으로 이회와 각성선사가 공사구역을 나누어 맡았는데, 이회는 동남쪽 구간의 공사를 맡았던 책임자였다.
그런데 이회가 맡은 구간은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했고, 벽암대사의 서북쪽 구간은 기일 내에 완성했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남은 비용을 반납하는 등 두 책임자의 국가적인 과업의 성과가 서로 비교됐다.
그래서 이회는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안에 마치지 못했다는 모략을 받아 참수형을 당하게 됐다.
그의 부인 송씨와 소실인 유씨 또한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던 길에 막상 한강을 거슬러 삼전도에 이르렀을 때, 천만 뜻밖에도 남편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기가 막힌 송씨 부인은 상심해 통곡하다가 끝내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집어던지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때 송씨 부인이 자살하면서 한강에 쌀을 버린 곳이라 해 그곳을 ‘쌀섬여울’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씨가 죽은 뒤로 안개가 자욱한 날이나, 해가 질 무렵 날이 어둑어둑할 때 쌀섬여울을 지나는 뱃사공들은 여인의 곡소리가 들리거나, 머리를 푼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공들은 이 환영(幻影)에 이끌려 배를 몰다 한강변에 어린애 같이 생긴 무동도(舞童島) 바위섬에 배가 부딪혀 파선되곤 하므로,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 쌀섬여울(일명 米石灘) 가까운 강변에(잠실동 313-1번지) 부군당(府君堂)을 세우고 송씨 부인의 제사를 지냈다.
이 부군당은 1971년까지도 있었는데 한강 개발사업으로 인해 한강의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쌀섬여울에 전해오는 슬픈 이야기는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전설’ 못지않은 슬픈 감회를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출처:역사문화연구소 박경룡 소장>
한편, 이 지역에는 백제 ‘온조왕 17년에 사당을 세워 국모(소서노)를 제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1686년에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부인사(夫人祠)>라는 시에서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사당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는 백제의 국모를 제사하는 사당이 17세기까지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억울한 넋 매가 되어 날았나


   
 청량당-송씨부인도
이회가 참수당할 때 그의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 부근의 바위에 앉아 사람들을 응시하다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겨 재조사해 보니 그가 맡았던 부분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돼 있어 무죄임이 밝혀졌다.
그가 쌓은 구간은 산세가 워낙 험해 성벽 기초공사가 어려웠기에 기일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억울하게 죽은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달래게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른다.
이 바위에는 매가 앉았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수어장대의 다른 이름인 ‘수어서대(守禦西臺)’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 청량산 이름 따온 사당 지어

사당의 이름을 ‘청량당(淸凉堂)’이라 부르게 된 것은 수어장대가 있는 곳이 청량산의 정상이기에 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남한산은 또 다른 이름으로 청량산, 주장산, 일장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데, 남한산=남한산성, 일장산=일장성, 주장산=주장성, 한산=한산성이라고 한 것과 달리 청량산=청량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예는 없다.
청량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중엽부터 사용됐는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의 선비들이 좋아하는 ‘맑고 서늘한 기운’이 서린 산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정조대왕이 기해년(1779)에 4박 5일 동안 남한산성에 머물렀을 당시 “남한(南漢)은 본래 이름이 일장산(日長山)이었으나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淸凉山)이라 칭하니 사람들이 청(淸) 나라 군병이 침범할 징조라고 하였다는데, 이러한 말이 과연 있었는가?” 하니, 서명응이 아뢰기를, “이것은 나이 많은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처럼, 청량산이라는 이름이 ‘청나라의 서늘한 침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한편, 청량당에 벽암대사를 함께 모시게 된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축조했고, 또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군을 이끌고 참전했기 때문이다.
백헌 이경석 선생이 지은 <화엄사 벽암대사 부도비>의 문장을 보면, 벽암은 김해 김씨이고, 호는 벽암(碧巖), 각성(覺性)은 법명이다. 충북 보은에서 그의 어머니가 북두칠성께 기도해 백발노인에게서 거울을 받아 지니는 태몽을 꾸고서 낳았다고 한다. 풍채는 서릿발 같았고 눈빛은 전기처럼 빛났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도가 돈독했는데,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므로 상을 마치고 출가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와 함께 해전에 참여했으며,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돼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청량당-이회 장군도

이에 나라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해 그 공로를 치하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지리산에 있던 벽암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 3천 명을 모집해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났으므로 항마군을 해산하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 이회의 내력 입으로만 전해져

한편, 억울하게 죽은 당사자인 이회에 대해서는 관련된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그가 태어난 해를 비롯해 가문에 관한 내력, 관직생활에 관한 사항 및 그가 처형당한 해가 어느 해인지, 그리고 처형당하게 된 사연과 관련한 역사기록을 살펴볼 수가 없고 단지 전해오는 설화와 실존하는 청량당 사당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장유(張維)가 지은 <남한산성기>에는 산성을 쌓을 때 처음에는 심기원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노는 사람들을 불러 일을 시키고, 도첩(度帖)을 가지고 승도(僧徒)들을 부리다가 마침 상(喪)을 당해 총융사(摠戎使)의 직을 떠나게 되므로, 이서가 그 임무를 대신해 널리 이름 있는 중을 부르니 각성(覺性)과 응성(應性) 등이 각기 그 무리를 거느리고 구역을 나누어 공사를 했다고 했다.
이때 목사 문희성, 별장 이일원, 비장 이광춘 등이 감독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이회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비변사등록>에 이회(李晦)라는 인물이 보이는데 1634년(인조 12)에 부사과(副司果), 형조좌랑 등의 벼슬을 했고, 1654년(효종 5) 11월 16일 “경상좌병사 이회(李晦)가 경안역에 이르러 뜻밖에 죽었다.”고 기록돼 이 인물이 남한산성을 쌓는 책임을 맡았다가 처형당한 인물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른 전설에는 처형당한 인물이 이인고, 홍대감 등으로 전해오기도 하는데, 이들 인물 역시 사건과 관련된 문헌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어쨌거나 1611년(광해군 3)에 이서(李曙)가 남포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처음부터 형벌을 씀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온 지경의 백성이 모두 놀라 뿔뿔이 흩어질 지경’이었다고 한 기록은 무과 출신의 이서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도 군율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했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간인으로서는 산성을 쌓는 일이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서 다른 부역에 비해 회피하고 싶은 것이었을 수도 있고, 이런 와중에 군율에 의해 처형당한 억울한 원혼도 있었을 것이다.
청량당에는 해마다 정월 초이틀이면 인근의 만신(부당)들이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이곳에 와서 치성을 올린다고 한다.
그것은 충직한 이회와 그의 부인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이 날은 송씨 부인이 한강에 투신한 날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남한산성 도당굿의 유래는 바로 청량당에 모신 영혼들을 달래기 것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당굿은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당지기 집이 철거되면서 맥이 끊어진 듯 했는데,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가 결성되면서 1991년 8월 28일 그 명맥을 되살리게 됐다.
<중정남한지>와 <남한가람지>에는 관에서 공식적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수어장대 옆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청량당이 자리 잡은 곳은 기우제단의 옛터가 아닌가 짐작되고, 이회가 실존인물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청량당은 억울한 원혼들을 위로해 주는 문화유산으로 그 의미가 있다.

 

 

 # 400년 된 향나무 의미있는 비틀림

 

 

청량당 앞에 오랜 풍상을 이겨내고 서 있는 향나무는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뒤틀리면서 기묘하게 자란 모양이 눈길을 끈다.
그 뒤틀린 모습은 마치 억울하게 형장에 끌려나와 처형당한 이회의 억울한 심사를 대신 웅변해주고 있는 듯 하다.
담장을 뚫고 밖으로 뻗어 나온 가지의 모습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회의 억울함을 말해 주는 동시에 몇 백년의 세월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는 역시 그의 충직한 삶의 자세를 엿보게 하여 가슴을 숙연하게 한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6편에서는 숭렬전과 침괘정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