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성남(城南) 역사의 뿌리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성남시가지=
도시개발의 선두 대열이라 할 수 있는 성남시는 현대 도시로서의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닌 시 승격 36년 나이테로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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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남시민들조차도 우리 고장의 뿌리를 모르는 이가 의외로 많다. 현대인들은 도시 산업사회의 삶이 다양해 생존경쟁에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상급학교 진학 시험과목에도 넣지 않고, 취업 시험과목조차도 비중을 두지 않는 현실에 더구나 지역 마을의 역사 이야기는 한낱 묶여 있는 책갈피쯤으로 생각되고 있지나 않을까?
# 2천 년 역사의 성남
성남시는 서울 한강 남쪽에 터를 잡았던 2천여 년 전의 ‘온조 백제’에서 역사 뿌리를 키워온 산 촌락 농촌이었다. 이 땅이 해방된 이듬해에 경기도 광주군 종가(宗家)에서 갈라진 ‘성남출장소’가 문을 열면서 ‘성남’은 ‘남한산성 남쪽 동네’라는 데서 출발했다.
남한산성의 정문은 남문인데, 1779년(정조3)에 ‘지화문(至和門)’이라 이름하고 수어사 서명응이 현판을 써서 걸었다. 이것은 산성 안의 인화관(人和館)과 더불어 화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모름지기 전쟁의 승패나 나라의 운명에 있어 “하늘이 내려 주는 운(天時)은 지리적 이로움(地利)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은 사람이 화합(人和)하는 것만 못하다.”고 맹자는 말했다.
그리고 정조대왕이 기해주필 때 연무관 앞마당에서 말하기를 “비록 이 남한산성이 지리적 이점은 얻었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화합이 없다면 누구와 더불어 성을 지킬 것인가?”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채무문서를 불사른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오늘날에도 그만큼 화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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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초 결성된 모란개척단의 국기게양식 모습 | ||
우리 마을 이야기는 광주군 관할 동네에서 원뿌리가 나타난다. 한강과 위례, 지금의 탄천을 에워싸고 있는 남한산성 숲속과 청계산 자락, 빌딩에 에워싸인 앞뒷산 언덕. 비탈 계곡을 터전으로 이 지역 여러 성씨들의 조상 족보 이야기에서나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성남이라는 이곳이 서울 한강의 대도시와 더불어 일정 부분을 감당해 나가는 발전된 모습은 누천 년 동안 최근에 와서야 처음 있는 일이다. 근현대사는 물론이요, 조선, 고려시대 또한 삼국시대 옛날의 기록상 세촌(중부)-대왕-낙생-돌마 네 시골 마을이 늘 낙향선비들의 은둔처로서 조상 묘역을 돌보는 여러 세거성씨의 농경·목축업 위주의 농촌민 취락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뛰어난 인물로 출세를 하려면 선대로부터의 고향 논밭을 등지기 일쑤였으며, 예전의 권문세가 후예라 하더라도 한학 독서로 소일하면서 조상과 웃어른들 잘 섬기는 마을 인심이었음직 하다. 간혹 십 년마다 한두 차례 일어났던 민란·권력암투·인접 강대국 침략 소용돌이라도 발생할라치면 노동부역, 방어군사로서 백성된 노릇에 충실할 따름이었을 것이다.
# 백제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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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대천 모습(현재 중앙로)...멀리 남한산성과 좌측으로 종합시장 건물이 보인다 | ||
온조왕이 어머니 소서노, 그리고 열 명의 부하장수들과 수천 명 집단유민으로 남하해 터를 잡았다는 한강 남쪽지역 하남 이성산성 둘레의 <한성백제> 건국이야기를 통해 진취적 용맹성을 짐작케 하며, 평화로운 나라의 백성을 다스려 보자는 온조와 소서노의 건국 야망이 서린 이곳 성남은 아들 비류와 온조를 도왔던 천하 여걸 소서노(‘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제왕일뿐더러,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여인’/ 단재 신채호<조선상고사>)가 터전을 잡은 한 자락이다.
이에 한강으로 흘러드는 성남시 ‘탄천(숯내·숲내)’ 16km의 물길 주변 들판이 우리 문자가 없었던 신화 속 역사에서도 농경생활로 끊임없이 대가 이어졌고, 역사의 위대한 인물 묘택(사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충효·청백리 큰 인물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는 성남 역사의 흔적은 향토문화 유산으로 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한편, 내란외침이 극성부리던 고려시대, 80년 가까이 우리를 괴롭혔던 몽고침탈에 있어 성남 관할의 광주군민 항전 이야기 또한 가슴 뭉클한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1231년 당시 광주부사 <이세화 묘지명>에서 ‘광주백성들은 오랑캐 군사들이 포위·공격했으나 능히 굳게 지켜 함락되지 않았으니’라는 고종 임금 때 적장 살리타이 섬멸작전의 이야기가 <고려사> 권 80에 근거함으로써 이에 남한산성 일원의 광주·강동·강남·하남·성남시 주변 지역이야말로 ‘나라 사랑’ 고장 중에서도 영원히 빛날 호국의 성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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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 대한제국 근현대사 안에서 항일 의병장 남상목·윤치장 선열과 초지일관했던 의절로 일생을 다 바친 일제강점기의 3·1만세운동 애국자 한백봉·한순회·남태희 등 시대별 큰 인물 숨결이 성남시 근간으로 남아 있어, 이들 뜨거운 애국혼령의 흔적들은 오늘날 성남 향토역사의 뿌리가 된다.
1945년 해방 이후 60여 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피흘렸던 순국자 혼령들과 살신성인으로 나라를 떠받친 정치가·학자·문인 외 효도 덕행의 삶이 청계산·영장산 능선에 유택으로 남아 성남시 전통의 문화와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 명품도시로 우뚝선 성남
지금 100만 명을 육박하는 성남시민들이 1960년대 후반에 서울 인구 15%나 되는 55만 명을 분산·이주시키기 위한 주택단지 건설로 탄생된 성남의 현대사회, 신도시 역사 중에서 지속적으로 80년대 분당과 21세기 판교 신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통해 그야말로 신도시 정책의 시험장 터널을 거쳐 왔던 시민들이다. 40여 년 역사를 가진 지금의 성남시야말로 전국 각 고장에서 모여진 선망의 정원풍 명품도시가 됐다.
성남시는 경기도 안에서 가장 쾌적한 도시 인프라를 자랑하며, 두 개 노선의 지하철이 매 5분 간격으로 오고가는 선진 문명도시이면서도 이곳에는 전국 제일의 명소로 손꼽히는 ‘모란 민속시장’이 열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누리고 사는 특이한 신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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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당 정자동 탄천변에 마련된 물놀이장 | ||
최근 대한민국이 세계 10위 권에 접어든 것과도 같이 성남시의 명성은 전국 10위 권 도시에 꼽혀져 교육기관·의료시설·백화점·공원 쉼터가 곳곳에 자리하고, 편리한 도로·교통망 역시 전국 최고로 살기 좋은 도시이면서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연구소, 새마을중앙연수원, 한국토지공사, 대한주택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도로공사 그리고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 등 전국 국가기관들이 즐비해 별난 신도시로서 손색이 없다.
그밖에 청계산 자락에는 옛날의 고속 통신수단이었던 천림산 봉수터가 있으며, 옛날에 한양과 3남 지방을 오가는 나들목은 오늘날에도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설치돼 있다. 요즘도 판교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유물이 발굴돼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신도시 성남의 역사는 ‘온조 백제’ 도읍지 한 자락으로부터 2천 년 전통문화를 이어온 긴 시간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하겠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2편에서는 둔촌 이 집(李 集) 선생의 지절(志節)에 대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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