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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남한산성 '守禦將臺' 현판글씨, 1836년 6월 익헌 박주수가 쓰다.

성남까치 2010. 4. 20. 17:45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글씨는 누가 쓴 것일까?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직접 언급한 문헌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현판에 새겨진 낙관을 관찰한 결과 이 글씨는 박주수(朴周壽)가 丙申(1836)년 7월 5일에 별세하기 불과 수일 전에 쓴 것임을 확인했다.
현판에 ‘守禦將臺’라 크게 쓰고 끝에 작은 글씨로 ‘丙申季夏下澣’라 하였고, 전서체로 ‘執**大將軍’이라는 직함을 양각한 주문(朱文)과 ‘潘南朴周壽君與之印’이라 음각한 백문(白文)낙관을 새겼다.
반남은 박주수의 본관이고 군여(君與)는 호다. 글씨를 쓴 것이 6월 하순이고, 박주수가 세상을 뜬 것이 1836년 7월 5일이므로 6월 하순에 쓴 이 글씨는 그가 세상을 뜨기 전, 생애의 마지막 유묵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직함을 새긴 낙관에서 ‘大將軍’ 앞의 두 글자는 사진을 촬영한 카메라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판독할 수 없었다.

윤종준 - 성남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박주수(朴周壽)는 1787(정조 11)년에 출생해 1836(헌종 2)년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박주수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군여(君與), 시호는 익헌(翼獻)다.
할아버지는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이고, 아버지는 호조 판서 박종보(朴宗輔)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 광수(廣修)의 딸이다. 고모가 순조(純祖)임금을 낳은 ‘수빈(綏嬪)’이다. 
순조 7년(1807) 문과에 급제해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선발되고, 규장각 직각이 되었다. 이어서 세자시강원 사서를 지내고, 승지가 되어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1819년 이조 참의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을 연임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827년 이조 참판이 되고 이어서 예조 판서에 올랐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이 되고, 1832·1834년 3차에 걸쳐 판윤으로서 한성의 업무를 관장했다. 선혜청 당상·대호군·훈련대장·화성유수·총융사·병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좌참찬 등을 지냈고, 왕대비의 총애가 두터웠다.
박주수가 병조판서로 있던 순조33년 3월(1833년), 농수산물의 중간 도매상인 경강상인(京江商人)들이 한강으로 실려오는 강상미(江商米)를 매점매석 하고 팔지 않아 쌀값이 폭등했다. 그러자 많은 서울 사람들이 불만을 갖게 되어 가게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르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 피해를 입지 않은 곡물전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군대를 풀어 폭동을 막았는데 박주수는 병조판서로서 7명을 저자거리에서 목매달아 죽이고, 11명을 먼 변방의 군대에 편입시키는 형벌을 주는 한편, 죄가 가벼운 27명은 곤장을 쳐서 방면하였다.
박주수의 조부인 박준원(朴準源, 1739(영조 15)∼1807(순조 7))은 정조 10년(1786) 사마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그의 셋째 딸이 정조의 수빈(綏嬪)이 되면서 원릉 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 좌랑을 거쳐 보은 현감(報恩縣監)이 되었는데, 그 위세가 드세었고, 정사도 엄정하게 처리했다.
1790년 수빈이 원자를 낳자 호산(護産)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서 호조 참의가 되어 궁중에 상주하며 원자를 보도하였다. 1800년 원자가 순조로 즉위하자 호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를 역임하고, 금위대장(禁衛大將)이 되어 이후 8년간 병권을 장악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덕행이 내외에 드높았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박주수의 아버지 박종보(朴宗輔, 1760(영조 36)∼1808(순조 8))는 어려서부터 품성이 돈후하고 단아하였으며, 언행이 근실하였다. 정조 11년(1787) 누이동생이 수빈(綏嬪)이 되자, 음직으로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등용되었고, 이어서 의빈부와 충훈부의 도사를 지냈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면서 가까운 척신이 국왕을 보호해야 한다며 외삼촌인 박태보를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1805년 성천 부사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 판서를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