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37) 남한산성의 의미와 보존활용

성남까치 2009. 12. 22. 11:24

(37) 남한산성의 의미와 보존활용

 

 =남한산성 남문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2009년 12월 21일 (월) 16:36:19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아져 현재까지 보존돼 오는 호국의 성지다. 남한산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인조 임금 때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이후 돌로 쌓아지면서부터다. 이 때 축성의 실무 책임자는 벽암 각성대사(1575~1660)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화엄사벽암대사비(華嚴寺碧岩大師碑)’는 병자호란 후 북벌운동의 주역이었던 백헌 이경석 선생이 1663년에 지은 것인데, 이 비문을 통해 벽암대사의 업적을 살펴본다.

 

# 비문에 남은 벽암대사의 고고한 일생

대사의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벽암(碧巖)은 호다. 충청도 보은에서 출생으로 속세의 성은 김해 김씨다. 어머니 조(曹)씨가 자식이 없었는데 목욕재계하고 북두칠성신에게 기도하자 오래된 거울을 꿈에서 보고 임신해 대사를 낳으니, 풍채와 기골이 바르고 엄정했고 눈은 번개처럼 빛났다. 효성이 지극했고 어려서도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9살에 아버지를 잃고서 몸이 매우 여위었다가 겨우 나았다. 상을 마친 후 지나가는 승려를 만나고는 출가할 뜻을 품고 마침내 어머니와 헤어져 화산(華山)으로 가서 설묵(雪默)대사를 스승으로 섬겼다. 14세에 머리를 깎고 보정노사(寶晶老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부휴(浮休:善修)가 화산에 와서는 벽암을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진실한 법을 권면했다. 곧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으로 들어갔고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으로 옮겨 다녔다. 날마다 경전을 보는 것이 이로부터 계속됐고 잠시도 놓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정(惟政, 사명당)대사가 관동에서 의병을 모으고, 부휴를 조정에 추천해 격문으로 부르니 벽암 또한 칼을 잡았다. 명나라 장수를 따라 바다에서 적을 격파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대사를 보고 매우 칭송했다. 벽암대사는 곡기를 끊고도 굶주리지 않았고, 밤을 새우고도 잠을 자지 않았으며, 늘 옷은 닳고 헤져 있었다. 방장실(丈室 : 方丈, 住持의 방)에 결가부좌를 하니 책 상자를 짊어지고 오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단이슬(甘露) 같은 가르침이 골고루 뿌려졌다. 스스로 세 개의 잠(箴)을 지어 문도를 경계했다.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 인조가 벽암에게 남한산성 축조 감독 맡겨

벽암은 여러 사찰을 창건하거나 혹은 중수했는데 지리산 화엄사의 대대적 중창, 송광사, 법주사 가람이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광해군 때 스승인 부휴선사가 요승의 무고를 당하니 대사가 함께 서울로 들어갔다. 광해군이 두 대사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서 부휴선사를 석방하고 대사는 광주 봉은사(奉恩寺, 현재 서울 삼성동)에 머물게 해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 고관대작과 사대부들이 대사와 친했는데, 그 중 상촌 신흠의 아들이며 선조임금의 사위인 동양위 신익성(東陽尉:申翊聖)과 각별한 사이였다.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 대사를 불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고 승도를 이끌고 축성을 감독하게 했다. 3년 만에 축성을 마치니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와 아울러 의발(衣鉢)을 내려주었다. 산성 안의 아홉 사찰 가운데 7개 사찰이 축성 때 8도 승군들의 주둔과 무기, 화약의 저장을 위해 새로 지어진 것이다. 벽암은 지리산에 있다가 병자호란(1636)이 일어났음을 듣고는 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대중을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 승려들도 임금의 백성인데 하물며 널리 구제함(普濟)을 근본으로 삼음에야! 나라 일이 시급하니 차마 앉아서 관망할 수 없구나” 했다. 바로 군복을 입고 궐기해 격문으로 남녘의 승려 수천 명을 불러 모아 이끌고 북진하던 중 적이 퇴각했음을 듣고는 통곡하며 남으로 돌아왔다.

 

  # 세수 86년, 법납 72세로 입적

효종은 즉위 전에 벽암대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물건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즉위함에 이르자 총섭(摠攝)의 직책을 제수하고 적상산(赤裳)의 사고(史庫)를 지키게 했다. 머문 지 얼마 안 돼 부안의 변산(邊山)을 올려다 보고 남해를 굽어본 후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했다. 기해년(1659년) 여름 효종이 승하하자 제사를 올리고 슬피 울었다.
1660년 정월 12일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상에 몸을 맡긴 지 86년, 법납(禪臘)은 72세였다. 다비를 행했는데 삼남(三南) 온 절의 불제자들이 골짜기를 메웠다. 사리 세 개가 튀어 나오자 절의 서쪽 기슭 부도에 봉안했다.
저술은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이 있다. 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벽암대사를 칭송하기를 “바위(巖)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예로부터 홀로 푸르도다(碧)”했다.

 

  # 역사적 시대적 특징이 면면히 이어지는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옛 광주권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적 문화유산으로 경기도 제일의 도립공원이다. 또 다른 명칭인 주장성(晝長城)이나 일장산성(日長山城)은 산성이 자리 잡은 남한산이 지리적으로 주변을 널리 관망하는 곳이어서 해가 길다고 해서 불려진 것이지만, 남한산성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성곽 가운데 남한산성 만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곽은 한 시대의 필요에 의해 축성돼 그 시대가 지나면 활용이 중단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해 남한산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축성됐고, 현대사회에 까지도 주민들의 삶을 포용하며 그 존재 가치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이 오늘날까지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빛내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역사적 특징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면면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하남·성남 3개 시에 걸쳐 둘레 9천50m에 2.3㎢의

   
 
면적인 남한산성은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에 수도를 정한 백제의 영토로서 고구려와 신라가 탐내던 고장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과 홍건적의 난 격퇴,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도 방위의 보장처가 됐다.

종교적으로는 불교 승려들에 의한 축성의 역사에서 호국불교의 성지이고, 천주교에서는 순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병자호란 후에는 북벌운동의 중심지였고, 한말에는 국권을 수복하고자 무력항쟁을 펼친 의병운동의 거점이 됐을 뿐 아니라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과 신간회 활동으로 이어지는 구국의 성지다.

문화적으로는 8도 문화가 융합되는 곳이며, 1626년 11월의 인구 이주정책에서 보이듯 도시계획의 초기 모델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수도권 주민들의 주말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고,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호국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기도 한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잠정목록

국제적으로 유네스코에서는 국제적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 ‘세계유산’, ‘인류의 무형유산’,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분류해 보존하고 있다. 이제 남한산성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한 잠정목록에 포함됐다. 세계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거해 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지칭하는 것이다.

인류문화사에서 보편적이면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닌 부동산 문화유산이 등재되는 세계유산의 종류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함께 담고 있는 복합유산 등으로 분류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세계유산 등재목록은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창덕궁, 수원 화성,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등이 등재됐다.
‘인류의 무형유산’은 200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에 따라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을 대표하는 무형의 문화유산에 대해 대표목록 또는 긴급목록에 각국의 무형유산을 등재하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처용무 등이 등재됐다.

‘세계의 기록유산’은 전 세계의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해 1997년부터 2년마다 세계적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선정하는 사업으로 우리나라는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및 제(諸) 경판 그리고 최근에 동의보감이 등재됐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해당 문화유산의 보호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지원을 높일 수 있고, 국가의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에 유산의 소재 지역 및 국가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키며 유산 보호를 위한 책임감을 형성한다. 목록에 오른 유산들은 국제적 협력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유산 보호를 위한 사업에 국제기구와 단체들의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정부의 추가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보존계획 및 관리의 수준이 향상된다. 또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방문객의 증가와 이에 따른 고용기회 및 수입이 늘어날 수 있다. 앞으로 남한산성도 빠른 시일 내에 완벽한 복원을 거쳐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우리들의 문화적 상징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38편은 이번 연재의 마지막 회로서 ‘광주문화권의 발전과 미래상’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