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하얼빈 의거를 지원한 동지들
하얼빈 의거를 지원한 동지들
=윤종준 성남문화원 상임연구위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전투에서 단신으로 이등박문을 사살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동지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참여가 있었다. 안 의사가 1908년 7월에 연해주에서 김두성을 총독으로, 이범윤을 총대장으로, 안중근 자신은 참모중장이 되어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도 경흥 등지에서 50여 명의 일본군을 소멸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사로잡은 포로를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해 준 것이 화근이 돼 적에게 아군 측의 정보가 유출되면서 패배하게 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실패한 안중근 의사는 연추로 돌아와 뜻이 맞는 11명의 동지들과 손가락을 자르고 독립투쟁을 맹세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했던 것은 앞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하기까지에는 여러 사람이 음과 양으로 후원하거나 참여를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대한의군참모중장 안중근에게는 동양 평화의 원흉 아등박문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의 과정이었다. 단지동맹을 결성하면서 안중근은 항상 스스로 맹세하기를, 3년 내에 이등박문을 죽이지 못하면 자살하여 자기의 무능을 사과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첫 첫공판에서 김두성 대장(大將)의 직속 특파독립대장(隊長)으로 만약 이등박문이 만주에 오는 시일이 좀 늦었으면 약간의 병사를 보냈을 것이고, 만약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더라면 군자금을 모아 군함을 사서 이등박문을 대마도 부근에서 요격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이 때 안 의사는 자기의 의거에 대해서는 일체 숨기려고 하지 않았으나 각 방면에 산재한 동지 등에 대해서는 비호하였고, 그 태도는 당당하게 재판관을 정시하고 두 손을 횡목(橫木)에 걸친 채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심문에 응했다고 한다.
의거를 하는 데 있어 한인동지회 회장인 최재형(崔在亨)의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의 한국인 지도자로서 안중근의 의병투쟁을 적극 지지하였을 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후에도 유가족들을 계속 돌보아 주었다. 1904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 고취에 힘쓰는 한편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의 국경 수비 상황을 탐지하는 한편, 의병을 이끌고 작전을 개시하여 함경도 일대의 일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안중근 의사와는 1909년에 단지동맹에 동참하였고, 1910년 7월 대동공보(大東共報) 신문사를 인수하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참여하고 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11월에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서 무장투쟁을 펼치던 중 체포되어 1920년 4월 총살 순국하였다. 동의회에는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엄인섭 등이 참가하였고 ‘해조신문’에 취지서가 보도되었다. 최봉준(崔鳳俊)은 1907년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일제침략의 성토 및 애국계몽 활동을 하였으며, 1908년 3월 21일자에는 안중근 의사의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을 게재하였고, 의거 후에 안 의사 유족을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최재형과 의형제를 맺는 등 항일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안 의사가 거사를 할 때 참여한 인물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동지들의 활약이 컸고 그 외에도 여러 애국 인사들이 후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윤능효(尹能孝)는 1907년 신한촌에서 최봉준, 우덕순 등과 활동하면서 안중근 거사를 지원하기 위하여 200원을 지급하였으며, ‘대동공보사’ 이강 주필은 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정보를 빠르게 입수하여 제공하였고, 김형재는 ‘대동공보(大東共報)’의 하얼빈 통신원으로 일하던 중,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자, 그를 유지 김성옥(金成玉)에게 소개, 거사를 도왔다.
우덕순(禹德淳)은 190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안중근, 이범윤과 더불어 의병투쟁에 참여하였고, 안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하는 데 있어서 제일의 조력자(助力者)였다. 사전에 이등박문에 관한 정보를 탐지하여 작전을 구상하는 데에 기여하였으므로 안 의사가 처형당할 때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안 의사와 함께 하얼빈역의 환경을 사전 답사하고, 하얼빈 공원에 가서 의거 지점을 철로 교차점인 채가구로 했다가 러시아어에 정통한 조도선을 그들의 통역으로 청하였다. 의거 전날 밤 안중근 의사가 ‘장부가’를 G으며, 우덕순도 이 때 한수의 ‘의거가’를 썼다.
우덕순의 시는 다음과 같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 너를 한 번 만나고자 일평생을 원했지만 / 하상견지 만야런고 너를 한 번 만나려고 / 수륙으로 몇만 리를 운선 혹은 화차로 / 천신만고 거듭하여 노청양지 지날 때에 /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 오호! 간악 이 노적아 우리 민족 이천만을 /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 소리 없이 뺏느라고 궁훙참악 저 수단을(중략) /
지금 네 명(命) 끊어지니 너도 원통 하리로다. / 갑오독립시켜 놓고 을사체약한 연후에 /
오늘 네가 북향(北向)할 줄 나도 역시 몰랐노라. /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 너뿐인 줄 아지마라. 너의 동포 5천만을 /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유동하(劉東夏, 1892~1918)는 함경남도 덕원(德源) 출신으로 1909년 10월 러시아의 자택에서 부친과 안중근·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 등과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세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서명할 것을 요청하고 연서한 뒤, ‘7인 동맹(同盟)’을 조직하였다. 1909년 10월 21일 동양평화를 저해하는 원흉인 이등박문이 러시아 재정대신 꼬꼬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오는 것을 알고, 안 의사가 거사를 목적으로 하얼빈으로 갈 때, 러시아어 통역을 자임하고 동행하였다. 이등박문이 1909년 10월 26일 아침에 도착하는 것을 확인하여 동삼성(東三省) 채가구(蔡家溝) 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중근에게 전보를 타전하였다. 이 때문에 안의사 거사 직후 일제에 붙잡혀 1909년 11월 1일 안중근과 함께 우덕순·조도선·김성옥·김태식·장수명·탁공규·김성화·홍청담·정태호와 함께 여순 감옥으로 옮겨져, 다음 해 2월 14일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8년 가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조선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하여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애국청년들이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하여 백계로군(白系露軍)의 축출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이를 가장한 일본군에 의하여 11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피체되어 싸말리야 강으로 끌려가서 총살 당하였다.
하얼빈 의거 직후 15명의 관련자가 체포되었는데,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은 이들에게 판결 언도를 내리는 날이었다. 망국의 원한을 안고 오직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청나라와 러시아 양국의 황야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신명을 걸고 사생을 서로 맹세한 애국우세(憂世)의 만고의사로 세계의 이목을 경동케 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판결은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방청인이 도열한 가운데에 러시아 법학사 야부친스키의 부처와 한국변호사 안병찬과 러시아 변호사 미하아로프 및 그 동행 러시아 영사관원과 안중근씨의 동생 정근·공근과 그의 종제 명근이 참석하였다. 오전 10시 반에 개정하고 진과(眞鍋) 재판장이 검찰관 구연(溝淵) 및 서기 통역생 등과 함께 참석함에 만정한 수백인의 시선은 재판장 진과(眞鍋)에게로 집중되었고 기자들은 붓을 들고 기다렸는데, 재판장이 피고 4인에게 대하여 판결주문을 언도하니 다음과 같다.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 징역 1년 6개월, 유동하 징역 1년 6개월, 그리고 범죄에 관한 압수 물건은 몰수한다.”고 하였다.
김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