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10) 안중근 의사에 대한 숭모의 글

성남까치 2009. 11. 9. 18:07

(10) 안중근 의사에 대한 숭모의 글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상임연구위원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안중근기념실

2009년 11월 08일 (일) 16:10:23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장부(丈夫)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

(안중근 의사 옥중 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총살한 뉴스는 세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우리 한민족의 정기가 살아 있어 독립의지가 확고함을 만방에 선포한 쾌거였다. 그리해서 세계의 언론은 이에 대한 사실 보도와 아울러 논평과 추모의 시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한국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일본에서까지도 큰 반향을 불러왔다. 일본의 정계는 발칵 뒤집어졌고, 한국과 중국에서는 통쾌한 환호를 보냈다. 이 때 일본은 러시아에 그 책임을 돌려 안 의사와 우덕순 등의 관련 인물을 체포해 일본에 인도했다.

   
 

여순감옥 전시실의 안중근 의사에게 내린 훈장증


한국의 독립투사들과 문인, 학자들은 안 의사의 의거에 격찬의 시를 바쳤고,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원세개나 중국의 국부인 손문, 주은래와 장개석 등은 정치적 입장과 견해를 달리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에 대한 숭모의 마음은 한결 같아서 송축시를 지어 추모했다. 이등박문이 총살되므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택영은 의병장 안중근의 ‘나라원수 갚은 소식을 듣고’라는 송축시를 지었다.

  황해도 장사 두 눈 부릅뜨고/
  나라원수 죽였다네, 염소새끼 죽이듯이/
  안 죽고 살았다가 이 기쁜 소식을 들을 줄이야/
  덩실덩실 춤노래 한바탕 국화조차 우쭐거리네./
  해삼위라 큰 매 하나 하늘 쓸고 돌더니만/
  하르빈 역 머리에 벼락불 떨어졌네/
  육대주 영웅 호걸 몇 분이나 되시는지/
  모두들 가을 바람에 수젓가락 떨구었으리. (한시로 지어진 것을 노산 이은상 번역)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수감돼 재판을 받고 순국하기까지 중국인들은 안 의사를 숭모하는 마음이 더욱 절정을 이루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는 동안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한국인이나 러시아인 변호사의 변호가 허락되지 않으므로 평양에서 달려왔던 안병찬 변호사는 안 의사를 면회하고 저녁에 여관으로 들어갔으나 울분이 북받쳐 이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한 접시 가량의 피를 토하고 30분 가량 기절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놀라 일본인 의사를 부르니 일본인 의사 중도(中島)가 와서 진찰하고 마음의 화가 심해 그런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양계초는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을 지었는데, “그 사나이 지척에서 발포하니, 정계의 거물이 피를 쏟았네. 대사를 마치자 웃음소리 터지니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 마냥 빛나리.”라고 했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으리”라고 죽은 후까지도 안 의사를 숭모하겠노라는 마음을 나타냈다. 또 장태염은 안 의사를 ‘아시아의 제일 의사’로 칭송했다.

신규식은 안 의사의 영전에 “공적(公敵) 이등박문 따위가 몇 천 몇 백으로 부지기수로다. 비록 우리의 안 장군은 귀로에 올랐어도 어이 제2, 제3의 안 장군이 없으리오.”했고, 박두진, 김현승, 주지훈, 박목월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숭모의 시를 바치거나 안 의사가 남긴 글을 작품으로 썼다. 박은식은 1914년 ‘안중근’이라는 책자를 상하이 대동서국에서 발행했고, 곧 이어 정원(鄭沅)이 쓴 ‘안중근전’이 장사에서 출판됐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과 5·4운동 이후로부터 북평, 천진, 무한, 장사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안중근 연극이 공연됐다.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망명한 한국학자 계봉우가 1914년 6월부터 8월까지 권업신문에 ‘안의사 전기’를 연재했고, 미국의 하와이에서는 홍종표가 쓴 ‘대동위인 안중근전’이 신한국보 신문사에서 발행하기도 했다.

 
   #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에 대한 응징

한편, 이등박문과 가장 밀접한 인물인 이완용에 대한 응징도 1909년에 이루어졌다.

이등박문은 1875년의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북양함대를 괴멸시켰을 뿐 아니라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빼앗아 갔고 군비 배상금으로 2억 냥을 빼앗아 갔다. 중국의 이홍장은 이등박문에 대해 “섬나라 이등박문의 조롱을 받은 것이 일생 일대의 최대 치욕”이었다고 했으니, 중국인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이러한 이등박문이 안 의사에게 저격당했으니 중국인들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 셈이었다.

이등박문과 관련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인물이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다. 이완용은 1907년 이등박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됐고,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고종황제의 양위를 요구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총살한 즉시 조문사절단을 꾸려 이등박문의 시신이 있는 중국 대련(여순)으로 달려갔다. 이완용은 을사5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평소에도 늘 “이또오는 나의 스승이다.”하고 공언하며 다녔을 정도였다. 이런 민족의 반역자에게도 역시 응징의 날이 오고야 말았으니, 1909년 12월 22일 현재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종현 가톨릭 성당에 이완용이 나타나자 이재명은 이완용을 암살하고자 시도했다. 이재명은 18세에 선교사를 따라 미국까지 유학했으며 1907년 헤이그밀사 이준 대사의 순국소식을 듣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애국지사들의 회의에서 역적 처단을 자원하고, 귀국한 후에는 동지들과 함께 국사를 도모하던 중에 1909년 12월 22일 명동천주교당에서 거행되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성당 문 밖에서 군밤장사를 가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인력거를 타고 나오는 이완용을 비수로 찔렀으나 실패하고 체포돼 경성형무소에서 1910년 9월 30일 2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그 역시 최후의 진술을 통해 대한의 의로운 정기를 밝히니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루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伸張) 하리라.”고 했다. 이재명 의사(義士)에게 치명상을 입고도 이완용은 1910 8월 한일합방에 앞장서 일본 정부의 백작이 됐다.

지난해, 이완용의 흉부외과 수술기록이 발견돼 언론에 보도됐는데, 이완용은 등 쪽에서 공격을 받아 왼쪽 2번째 갈비뼈를 관통하는 자상과 오른쪽 등 아래 부분을 관통하는 자상을 입었다고 보도됐다. 이완용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받고 53일간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 옥중 안 의사 글씨

 

시조 시인인 한춘섭 현 성남문화원장의 숭모시를 소개한다.

 

제목 - 억조 창생(億兆蒼生) 결의여!

 

금이 간 왕조(王朝)의 태(胎) 항아리 속에는
망국의 비애로움
먹먹히 고여지고,
칼바람
옥죄인 생명
하르르 지던 오얏 꽃

약탈자 하늘에도 달과 별이 떴으련만,
아, 차마 못 믿을레라
국모(國母)는 버히시고,
살기 찬
부시부엉이
저지른 짓 모르네

조국에 돌아오고픈 빼앗긴 목록(目錄)들이
아직도 녹슨 더께
눈썹 마저 세었는 데
해안선
구겨진 지도
독도(獨島) 내어 달라하네

애국의 붉은 핏물 마디 잘린 손 도장은
기도문(祈禱文)을 새긴 채
바람 벽에 걸어 두면
겨레여,
의(義)로운 분노
심장 다시, 뛰나니

나라 사랑 열사(烈士)들 한 맺힌 어제가
아직도 저릿저릿
전기처럼 오고 있어
동지여
대한 동지(同志)여,
억조창생 결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