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독립투쟁 유적지 답사 7 =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하여 처리하라.

성남까치 2009. 10. 19. 13:13

독립투쟁 유적지 답사 7 =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하여 처리하라.

성남문화원 윤종준 상임연구위원

 

 

 

 

 =안 의사 압송 마차

 =여순 관동법원 법정

=여순 관동법원 옛 모습

 

=여순 관동법원 현모습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지하에 갇혀 1차 조사를 받은 후 쇠사슬에 결박 된 채, 1909년 11월 3일 동지들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여순(旅順)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여순은 중국의 북방 항구도시인 요녕성 대련시의 6개 구 가운데 하나다.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두 나라는 여러 곳에서 충돌하였는데, 황해바다와 압록강 일대가 모두 격전장이 되었다. 여순은 1894년 11월 21일 일본군에 함락되었는데, 일본군은 11월 8일 여순에 거주했던 2만 명에 가까운 양민들을 학살하였으니,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그 후 다시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전쟁에서도 여순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곳에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를 두어 총독의 지휘 감독 아래 법원과 감옥을 설치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이곳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11월 4일부터 12월 26일 까지 11번에 걸친 신문(訊問)을 받았으며, 일본 본국에서의 지령에 의해 급속하고도 강압적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안의사는 자서전에서 “나는 스스로 생각하되 ‘검찰관의 생각이 이같이 돌변한 것은 아마 제 본심이 아니요, 어디서 딴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일 것이다. 그야말로 도심(道心)은 희미하고 위태롭다더니 빈 문자가 아니로구나.”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바로 일본 정부의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관동 도독부 법원에서는 안 의사 의거에 대해 재판 관할권의 애매모호한 점, 안 의사의 돈독한 신앙심 등으로 무기징역을 검토했으나, 본국 내 강경파에 의해 서둘러 극형에 처하라는 밀명을 전해옴으로써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외무성에서는 정무차관인 구라찌를 여순에 보내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감독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통감부 헌병사령관 이끼이시로 하여금 구라찌의 업무를 지원하게 하였다. 관동도독부 법원이 무기징역을 검토한 것을 눈치 챈 일본 정부에서는 12월 2일에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고 비밀 지령을 보냄과 동시에 여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를 동경으로 소환해 명령 집행을 보증하게 하였다. 이러한 강압적 분위기로 변함에 따라 안의사는 “인생이 세상에 나서 한 번 죽으면 그만인 데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11차례의 조사 끝에 1910년 1월, 안의사에 대한 첫 번째 공판(公判) 날짜를 2월 7일로, 장소는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으로 결정되었다. 당시의 재판제도는 2심제였고, 이를 보완하는 예심을 1심 전에 거치는 구조였으나, 안 의사는 본국 정부 지령에 따라 예심 없이 1심 공판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 검찰관은 안중근 의사에게는 살인죄를, 우덕순과 조도선은 살인 예비죄, 유동하는 살인 방조의 죄명으로 공판에 회부하였고, 지방법원은 속전속결로 재판부를 구성해 지방법원장 마나베, 검찰관은 미조부찌, 관선변호사는 미즈노와 가마다로 결정하였는데, 특히 여기에는 조선인 변호사는 물론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 등 어느 외국 변호사의 선임도 허용하지 않았고 오로지 일본 정부가 결정한 관선변호사만 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1910년 2월 7일 월요일 오전 9시경, 안의사와 동지들은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삼엄하게 호위하는 가운데 일본에서 들여온 마차에 실려 여순 감옥을 나서, 관동도독부 법원 제1호 법정에 도착했다. 공판정에는 블라디보스톡의 동지들이 보낸 러시아인 변호사 미하일로프, 해외 동포들의 성금으로 보낸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 서울에서 안 의사의 어머니와 유지들이 보낸 안병찬(安秉瓚) 변호사 등이 참석했으나, 일본은 이들을 일체 공판에 참여할 수 없게 해 불공정 재판을 열었다. 안 의사가 법정으로 이동하는 동안 수많은 인파가 새벽 6시경부터 몰려들었는데, 방청이 허락된 것은 300명만 허락하였고, 러시아인 3명, 한국인 3명(안병찬 변호사와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더글러스 변호사만이 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 날 역사적 재판을 취재하러 많은 신문기자들도 몰려 왔다.

 

이 날 첫 공판은 9시 20분경에 시작되었으니, 여기서 안 의사는 ‘연해주에서의 3년간 생활의 목표가 무엇이었냐’는 판사의 신문에, “첫째는 한국을 계몽시키는 교육운동, 또 하나는 내가 대한의 의병으로써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었다.”고 답변했다.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에 있어서는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임을 말하고, 이등박문의 15가지 죄악상을 열거하면서,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신을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라 처리하라고 요구했다.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진술하므로 일본인 방청객들도 상당수 깊이 감동하므로 재판장은 안중근 의사의 발언을 주지 시키고 서둘러 공판을 종료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은 일본 정부에서 이미 사전에 지령한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돼 신문, 변호, 구형 등이 7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 만에 6차례의 공판을 끝났다. 10일은 한국의 설날이기도 하였고, 사형을 언도한 시각은 이등박문이 죽은 시각이기도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불공정 재판이라는 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지적된다.
첫째는 사건이 러시아가 관할하고 있는 하얼빈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본이 재판권을 행사할 권한은 없다. 둘째는 안중근 의사의 국적과 신분이 한국인이므로, 한국의 법이 아닌 일본의 형법을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 번째로는 외국인 민선변호인단의 변호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정한 관선 변호사만을 지명한 것은 법률 위반에 해당된다. 네 번째로는 피고의 언권(言權)을 봉쇄한 상태에서 속전속결로 진행한 점, 여섯 번째는 전쟁의 포로를 국제법에 의해 재판하지 않고 살인범으로 몰아 재판을 한 점 등이다. 일본의 관동도독부 법원은 만국공법도 무시하고, 약소국 국민을 자신들의 형법에 따라 살인죄를 적용해 부당한 재판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이 진행되었고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안 의사는 태연히 미소를 지으며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는 상고(上告)를 거절하였다. 일본 고등법원장 히라이시가 형무소로 찾아와 안 의사에게 상고를 권유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안 의사의 이러한 장부다운 결정에는 그의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 안 의사의 어머니는 사형 선고 소식을 듣고는 안 의사의 두 동생을 급히 보내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전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전한 이 말은 한국의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뜻으로 ‘시모시자(是母是子)’라는 글을 실었다. 또, 영국 기자 찰스는 “이 세계적인 판결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며,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등박문은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여순 일대는 군사도시로서 외국인들의 출입이 다른 도시에서와 같이 자유롭지 못하며 주변에 식당을 비롯한 편의 시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통일교 측에서 이 일대에 대한 관광지 개발을 하면서부터 점차 출입이 허용되었다.

김대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