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독립투쟁유적 답사기

안 의사 독립투쟁 유적 답사기-2

성남까치 2009. 9. 14. 09:41

(손가락을 자르고 그 피로 대한독립을 맹세하다)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 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애국지사다. 안중근 의사는 문무를 겸비한 10대 시절을 보냈다. 자서전에서 안 의사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 짐승 등을 사냥하느라고 학문을 힘쓰지 않으므로 부모와 교사

   
 
들이 크게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와 학생들이 서로 타이르며 권하기를 “그대 부친은 문장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는데, 너는 어째서 장차 무식한 하등인이 되려고 자처하는 것이냐.”하므로 나는 대답하되, “네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보아라. 옛날 초패왕과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 했는데 만고 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더 나를 권하지 마라.”하였다.

이후 안 의사는 17세 때 프랑스인 빌렘(홍석구)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프랑스어와 서구문화에 접하게 됐고 10년간 홍 신부와 함께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전파에 힘썼다. 안 의사는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서울의 천주교 최고 책임자인 프랑스인 뮈텔 주교를 만나 한국에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유럽의 천주교 수사회가 한국에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학문이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한국은 아직 대학교육이 시기상조라고 거절하자, 안 의사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 언정 외국인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했다.

 # 러일전쟁 후 중국 시찰, 계몽운동 나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해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됐다.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마음의 병이 깊어졌고 안 의사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중국을 시찰했다.

중국의 산동과 상해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안 의사는 이 지역에 반일운동의 기지를 만들고자 상하이와 산동 지역을 돌아보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선교활동을 같이 하던 곽 신부를 만나 그의 조언으로 일단 애국계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웠던 것인데 이때 안창호(安昌浩), 이준(李儁)과 같은 이들이 강사로 초빙됐다.

안 의사는 또한 서상돈이 일으킨 국채보상 운동에도 적극 선도해 자신의 가족들부터 솔선해 금은반지와 장신구를 헌납하기도 했다.
이처럼 계몽운동에 헌신하던 안 의사를 의병이라는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게 한 것이 일본의 통감정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이등박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조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하는가 하면, 산림과 광산 그리고 철도를 빼앗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한일 합병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 연해주에서 항일투쟁 시작

마침내 안 의사는 ‘학교 교육으로는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하고 무장투쟁을 하고자 결심하고 해외로 망명하니, 이때 나이 29세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한 안 의사는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 해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의군 창설을 하고 안 의사는 참모중장으로 선임돼 독립특파대장의 직함으로 치열한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

그해 7월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함경도 경흥에서 일본 군경과 세 차례의 교전에서 50여 명을 사살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군 기지가 있는 회령으로 진격해 3천여 명의 일본 수비군을 물리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 교전해 이때 사로잡은 포로들을 국제 공법과 인도주의에 입각, 석방했으나 의병진에서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석방된 일본군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고, 탄환이 떨어지므로 중과부적으로 패해 흩어지게 되니,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장마 속 산길을 헤맨 끝에 연해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때 안 의사는 의병들에게 시로써 위로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 큰일을 못이루니 몸두기 어려워라 /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안 의사는 국내 진공작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도 실패한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브스크 등 러시아 지역과 중국 흑룡강 상류 지역을 시찰하며 강연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를 규합하고자 노력했다. 이 무렵 일진회 일당들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겪어야 했다.

 

   
 
# 31세 때 동의단지회 조직

1909년 2월 7일 31세인 안중근 의사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했다. 11명의 동지와 함께 연추(煙秋) 부근 카리 마을에서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 간에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인 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하자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 하여, 마침내 열두 사람이 각각 왼편 손 약지(藥指)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자를 크게 쓰니 ‘大韓獨立’이었다. -안중근 자서전

이때 혈맹에 참여한 동지들은 안 의사 자신을 비롯해 김기룡29세), 강순기(39), 정원주(29), 박봉석(31), 류지홍(39), 조순응(24), 황병길(24), 백규삼(26), 김백춘(24), 김천화(25), 강창두(26) 등이었다. 이들의 단지동맹을 기념하는 비석이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크라스키노 카리 마을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을 기리기 위해 4.5m×5.7m 크기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형상을 만들고 12명 동지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지금 이 지역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국경지대인데, 원래 비석이 있던 곳은 현재의 기념비가 있는 옆으로 흐르는 하천의 300m 정도 하류에 있는 다리 옆이었으나 수시로 침수가 되므로 지금의 위치에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단지동맹비 앞 광활한 벌판에는 현재 남양알로에서 대규모의 한약재를 재배하는 농장이 조성돼 있다. 만주지역에 논농사 기술을 전해 주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개척해 온 역사를 되새기게 해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