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의사 독립투쟁 유적 답사기-2
(손가락을 자르고 그 피로 대한독립을 맹세하다) | ||||||||||||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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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 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애국지사다. 안중근 의사는 문무를 겸비한 10대 시절을 보냈다. 자서전에서 안 의사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 짐승 등을 사냥하느라고 학문을 힘쓰지 않으므로 부모와 교사 이후 안 의사는 17세 때 프랑스인 빌렘(홍석구)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프랑스어와 서구문화에 접하게 됐고 10년간 홍 신부와 함께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며 복음전파에 힘썼다. 안 의사는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서울의 천주교 최고 책임자인 프랑스인 뮈텔 주교를 만나 한국에 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유럽의 천주교 수사회가 한국에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학문이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한국은 아직 대학교육이 시기상조라고 거절하자, 안 의사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 언정 외국인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했다. # 러일전쟁 후 중국 시찰, 계몽운동 나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그 해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됐다.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마음의 병이 깊어졌고 안 의사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중국을 시찰했다. # 연해주에서 항일투쟁 시작 마침내 안 의사는 ‘학교 교육으로는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하고 무장투쟁을 하고자 결심하고 해외로 망명하니, 이때 나이 29세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한 안 의사는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 해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의군 창설을 하고 안 의사는 참모중장으로 선임돼 독립특파대장의 직함으로 치열한 항일 투쟁을 시작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 큰일을 못이루니 몸두기 어려워라 /
1909년 2월 7일 31세인 안중근 의사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통해 ‘동의단지회’를 조직했다. 11명의 동지와 함께 연추(煙秋) 부근 카리 마을에서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유지를 위해 헌신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 간에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인 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하자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 하여, 마침내 열두 사람이 각각 왼편 손 약지(藥指)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자를 크게 쓰니 ‘大韓獨立’이었다. -안중근 자서전 이때 혈맹에 참여한 동지들은 안 의사 자신을 비롯해 김기룡29세), 강순기(39), 정원주(29), 박봉석(31), 류지홍(39), 조순응(24), 황병길(24), 백규삼(26), 김백춘(24), 김천화(25), 강창두(26) 등이었다. 이들의 단지동맹을 기념하는 비석이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크라스키노 카리 마을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을 기리기 위해 4.5m×5.7m 크기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형상을 만들고 12명 동지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