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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일보=재미있는 인류문화사<3.정착과 사회조직 1-2 신석기시대>

성남까치 2009. 8. 7. 16:04

3.정착과 사회조직
1-2) 신석기시대
예로 여자(부녀)가 재배한 채소(소채 소채)는 배추(백채)와 겨자 또는 갓(개채 개채)이며 짐승을 개, 돼지, 소, 양, 닭 등 5대 가축이다. 사냥도구는 석제창, 석제화살촉, 뼈제화살촉과 조립식 석제낚시바늘 등이다. 농업도구는 돌도끼, 돌삽, 돌소형꽹이, 석재칼, 돌낫, 뼈제낫, 손잡이 달린 돌칼, 뼈와 뿔제의 바늘 등이다.
상기한 사냥, 물고기 잡이와 농사용 도구 외에 여자들이 제작한 토제용기는 모두 10종이다. 불을 피워 음식을 익히는 솥으로 물동이(罐), 다리달린 솥(鼎), 솥(釜), 시루(甑)등이다. 음식을 먹는 그릇은 밥그릇(碗), 사발(鉢), 작은 그릇(盆)이며, 음식의 저장 용기는 오이(瓮), 단지(罐)등이다. 또한 물을 먹는 그릇은 주둥이가 작고 끝이 뾰족한 병(小口尖底甁, 소구첨저병)등이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가 많으며, 고운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문양은 작은 그릇과 사발 등에 비교적 많이 처리됐다.
신석기시대 최초 정착된 가옥들은 기본적으로 큰 강 제방에 깊이 1m 정도를 파고 원형→타원형→방형으로 발전됐다. 기본적으로 원형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m 정도로, 입구는 사람이 1인 정도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이며 문길은 경사지게 만들어졌다. 가옥 중심에 제일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약 1m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세워 중심기둥 방향으로 경사지게 해서 동여매고 그 위에 나뭇잎, 갈대 잎 또는 짐승가죽 등으로 덮었다. 집 내부에는 중심기둥과 문 입구 사이에 화덕자리(노지)를 설치해 음식을 익히고, 난방처리 등을 했다. 이러한 가옥구조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입구가 남쪽이며 부부가 문 입구 남쪽에서 자고, 그 상대편 북쪽에서는 노인의 잠자리이며, 동과 서의 끝에서는 남자 어린아이와 여자 어린아이들이 자도록 엄격히 구별되고 있는데 이는 신석기시대 최초 정착 집 자리의 구조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최초의 원형 집 자리는 삼각형의 지붕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인류의 사고세계는 기본적으로 후기구석기시대(기원전 3만5천~1만 년) 사이에 이미 신앙심(believing)이 존재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근거는 유럽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벽화(Cave arts)중에 많은 짐승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당시의 조각품은 모두 여자를 조각한 비너스(venus)상 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심을 기초로 해 인류의 사고세계는 신앙→종교→철학→과학으로 발전됐다. 씨족사회의 형성과 발전과정 중 ‘도참숭배(圖讖崇拜·Totem)’가 탄생됐다. 사람들의 선조가 자연물 또는 동물을 숭배하게 된 것은 자기 씨족(Clans)의 기원과 보호자와 연관돼 있다. 이러한 자연물과 동물은 씨족의 상징과 본씨족을 보호하는 신(神靈·신령)으로 돼 있다. 각 씨족은 모두 일종의 동물 또는 무생물을 자기 씨족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곧 씨족의 휘호(徽號, 旗章·기장)또는 도참(Totem)이라고 칭한다. 도참은 씨족의 표지(標志·상징)이다.

씨족 성원은 도참(토뎀)을 조상으로 숭배하는 신으로 삼았다. 예로 중국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앙소(仰韶)유적의 씨족 부락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상의 문양인 물고기, 사슴, 개구리와 사람얼굴 등을 당시의 씨족 도참으로 보고 있다. 도참숭배는 일종의 원시신앙의 관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표현은 사람이 죽은 후 무덤속에서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앙소문화의 씨족 부락에서는 단인장이 성행되고, 시신은 똑바로 누워있는 앙와 직기장이며, 머리 방향은 서향이다. 또한 단인장 주위에 가족묘라고 볼 수 있는 옮겨진 합장묘로서 많은 것은 23구의 시신들이 있는 것도 발견됐다. 또한 어린아이의 사망처리는 옹관장으로 처리되고, 옹관 위에는 작은 그릇 또는 사발로 뚜껑을 덮었다. 또한 이 뚜껑그릇 바닥에 한 개의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영혼의 출입구멍으로 보고 있다. 또한 무덤에 묻혀진 성인의 부장품은 모두 생활용구, 장식품 등이다.
모계씨족 사회는 원시사회 발생의 기본 사회조직으로 인정되고 있다. 원시 모계씨족사회 내에서 생산된 모든 것은 공유제(公有制)로 보고 있다. 씨족이 머물고 있는 지역, 산림, 하천, 가축, 주거지 및 생산도구와 제작된 토기 등은 전체 씨족의 소유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씨족 성원은 사후에 공동묘지에 묻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모계씨족 사회가 발전되는 과정에서 같은 피를 가진 사람들의 결합이 엄격히 금지되면서 집단혼제가 점차적으로 대우혼제(對偶婚制)로 발전됐다. 대우혼제는 일남일녀가 잠시 머물도록 허용된 혼례다. 다만 아직 독립된 동거는 아니다. 아직 계속적으로 ‘엄마만 알고 아빠를 모르는 정황(知母不知父的情況)’이 지속됐다. 씨족 내부혈통은 여전히 아이들의 모친의 씨족에 속해 있었다. 남편은 자기 모친의 씨족에 속해 있었다. 당시 사람이 죽으면 본씨족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앙소문화유적 중 성인 남녀가 합장된 예는 찾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