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남한산성의 호국사찰(護國寺刹)
남한산성의 호국사찰(護國寺刹) |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
=장경사 전경
1624년(인조2), 승려 각성(覺性)으로 하여금 팔도도총섭을 삼아 성을 쌓는 일을 맡겨 8도의 승군을 모집하고, 또한 성안 각 사찰에서 8도 승려 부역승군의 숙식을 나누어 맡게 했다. 1624년 축성을 시작할 때 망월사가 가장 오래 됐고, 옥정사가 다음이며, 그 나머지 일곱 사찰은 모두 새로 세운 것인데 동림사가 가장 늦고 영원사도 또한 늦게 세웠다.
모두 성을 지키는 것을 임무로 맡겼으며, 각 사찰에 군사무기와 화약을 저장했다. 이후로 1894년까지 승군들이 9개 사찰에서 산성의 수비를 맡았다.
▶개원사=개원사(開元寺)는 현재 남한산성 역사관 옆길 안쪽으로 있다. 개원사로 오르기 전에 우선 역사관 주차장 옆에 있는 지수당(地水堂)과 관어정(觀魚亭) 터가 있는 연못을 둘러보자.
지수당은 세 개의 연못으로 조성됐는데 지금은 두 개만 남아 있다. 지수당은 1672년(현종13) 부윤 이세화(李世華)가 엄고개에 주정소를 새로 지으면서 폐목재를 옮겨와 세웠다. 남학명이 지은 <지수당기>에 “백성을 용납하고 무리를 기른다는 뜻”이라 했고, 관어정은 지수당과 마주했는데, 김재찬의 <관어정소지>에 “제갈량이 못에 임해 고기를 구경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 못에 임해 방책을 결정하며 고기를 보고 적을 헤아려, 앉아서 위나라 군사 10만을 막으니, 그 관찰은 진실로 술(術)에 있고, 취(取)함은 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후일 이 정자에 올라 ‘관어정’ 이름을 따라서 경계할 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는 기록이 전한다.
개원사는 불경을 많이 소장했고, 무게가 각각 200여 근이나 되고 쌀 몇 섬을 담을 수 있는 큰 놋쇠 동이가 4개 있었으며, 연못에 금붕어를 길렀다고 한다.
1637년 가을에 한 조각배가 서호(西湖)에 흘러 들어왔는데, 배 안에 사람은 없고 오직 대장경 책상자만이 들어 있었고, 상자에는 ‘중원 개원사 개간(中原開元寺開刊)’이라는 일곱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비변사를 통해 임금에게 전달하니 임금이 말하길, “사람이 배를 이끈 것도 아니면서 배가 갑자기 스스로 왔으니, 이는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다. 이 책이 중국 개원사에서 나왔으니, 우리 사찰에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을 찾아서 길이 간직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 그 때 8도에서 ‘개원’이라는 이름은 남한산성에만 있는 까닭에 금란보(金?洑) 열 벌로 싸고 따로 사신을 보내 이 절에 간수하게 됐다.
1666년(현종7) 화약고에 불이 났는데 갑자기 반대쪽에서 바람이 일어 불을 껐다. 1694년(숙종20) 겨울에도 불이 나서 다섯 칸 누각이 모두 탈 것 같았는데 갑자기 큰 비가 내려 불을 껐기 때문에 누중(樓中)에 보관하던 군사 무기가 하나도 상한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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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사에 설치된 경통 |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1636년), 12월 21일 개원사의 승려 삼인(三印)이 말과 소를 한 마리씩 바쳤는데, 임금이 이를 군사들에게 먹이도록 명했다. 또, 꿀 세 말을 진상하니 모두 상으로 주었다. 이경석(李景奭)은 형인 이경직(李景稷)과 이안눌(李安訥), 장유(張維)와 함께 개원사에 거처했는데, 이경석은 밤마다 한두 차례 일어나 행궁까지 걸어가 임금에게 문안했고, 물러 나와서는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서로 충의(忠義)로서 권면했다. 개원사는 또한 숭은전(崇恩殿)에 있던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定遠君)의 영정과 문묘의 위판(位版)을 봉안했던 남한산성 최고의 사찰이기도 하다.
▶한흥사=한흥사(漢興寺)는 개원사 동쪽 기슭에 있었다.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돼 공어(供御)하는 물자가 모두 부족했는데, 한흥사의 승려 희안(希安)이 백지 40권, 산채와 무나물 한 가마니씩을 바쳤다. 종이는 비변사에 하사하고 나물은 왕자·대신·부마에게 나누어 주게 됐다.
▶국청사=국청사(國淸寺)는 서문 안에 있었는데 현재의 국청사 삼성각 뒤편에 터가 남아 있고 바위에는 방아를 찧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구덩이가 두 개 패여 있다. 누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작은 샘물이 나오고 있을 뿐이다. 절의 위치가 부국(富局)에 있어 부승(富僧)이 많다고 한다. 1624년 각성스님이 ‘한흥’과 ‘국청’ 두 절 이름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다가 호란 후에 비로소 한(汗)은 한(漢)과 음이 같고, 금나라가 이 해에 청(淸)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을 깨달았다. 인조도 이를 기이하게 여겨 각성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장경사=장경사(長慶寺)는 동문 북쪽에 있는데, 절 뒤로 철쭉이 많고 솔숲에서는 송이버섯도 채취하던 곳이다. 진남루 남쪽에는 망대가 있어 그곳에 오르면 그윽한 경치가 여러 사찰 가운데 으뜸이었다. 호란 때, 한밤중에 적이 동쪽 성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와 성이 거의 함락되니, 남녀가 성을 넘어 달아나는 자가 몹시 많아 성안이 가마 속 끓듯 했다. 이 때 어영별장 이기축(李起築)이 장경사에 있다가 죽을 힘을 내어 몸을 빼내 독전하니 적이 물러갔다. 이에 임금이 친림해 위로의 말을 내리고 특별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완계군(完溪君)을 봉했다. 이기축은 무과에 급제한 후 종형제인 이서(李曙)가 1622년(광해군14) 장단부사로 부임할 때 함께 내려가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綾陽君:인조)의 잠저(潛邸)에 내왕했다. 반정 때, 장단에서 선봉장이 돼 입성했고,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어영별장(御營別將)으로 활약했다. 그의 부조묘(不 示+兆 廟)가 현재 하남시 상사창동에 있다.
▶천주사=천주사(天柱寺)는 서장대 아래에 있었고 누 앞에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빈 절터 옆으로 민가가 자리 잡고 있다. 김석주(金錫胄)의 <천주사> 시가 전해 온다.
천고의 온조왕 자취가 묘연하며 / 유치(遺恥)에 올라 흘겨보니 눈물의 흔적이로다./
산승은 흥망의 일 간여치 않고 / 창문 향하여 연화경을 공부하네./
피리 불며 높은 누각 기대니 / 누각 밖으로 옛 싸웠던 언덕 훤히 보이네./
바람 불 때 변방으로 나가라는 부름 기다리지 아니하고 / 외로운 성의 달빛에 견디어 시를 짓네.
▶옥정사=옥정사(玉井寺)는 북문 안쪽의 남쪽 기슭에 있었는데, 절 뒤에 큰 우물이 있어서 이렇게 이름 지었고, 현재는 지름 150cm의 맷돌만이 남아 있다.
▶망월사=망월사(望月寺)는 장경사 뒤 기슭에 있는데, 예부터 망월암이 있던 곳이라서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고려 때 한양에 장의사(壯義寺)가 있었는데 태조가 한양성을 쌓으면서 이를 헐고 그 불상과 금자(金字) 화엄경 일부와 금정(金鼎) 하나를 여기에 옮겨 두었다. 커다란 맷돌과 방아를 찧었던 구덩이를 판 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동림사=동림사(東林寺)는 봉암(蜂岩) 아래에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봉암에 올라가 성 안의 허실을 염탐했기에 1686년(숙종12) 부윤 윤지선이 비로소 외성을 쌓으니 이것이 봉암성이다. 둘레가 962보, 7리가 되며, 여첩이 294개, 암문이 4곳이며, 군포가 15곳이다. 동림사를 지어서 이곳을 지키게 했고, 숙종 31년에 수어사 민진후가 5개의 포루를 증축하고 정조 기해년에 고쳐쌓았다.
이민서(李敏敍)가 시를 읊기를, “산 머리에는 성이 백장(百丈)이요, 정자 벽은 둘레가 너그럽다. 보호하고 취하는 데 전 일을 참고하겠으나, 올라보니 장관을 얻었네. 오색구름은 하늘이 지척이요, 유월인데도 땅이 높아 찬 기운이 드는구나. 사전에 대비책을 계획하여, 길이 나라가 편안토록 하겠다.”고 했다. 현재는 우물과 맷돌만이 옛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남단사=남단사(南壇寺)는 한흥사 서쪽 기슭에 있었다. 남단사 오른쪽 옆에 사단(社壇)이 있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남단사라고 부르게 된 듯 하다. 사단은 좌사(左社)와 우직(右稷)의 양단이며, 담장을 둘렀고, 4문과 각(閣)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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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사 가는 길에 있는 지수당 |
정조대왕의 행장에 “지금의 남단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하던 환단(口안에 玉뺀 環 壇)이다. 이 땅에 이 나라를 단군이 처음 세우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무더기를 쌓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한다. … 광묘(光廟:광해군) 이후로 ‘환단’을 고쳐 ‘남단’으로 불러왔다. 대체로 군·국·주·현(郡國州縣)이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 제 올리는 곳으로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촐하게 모시는 정성이야 환단이거나 남단이거나 그 이름이 다르다 하여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한 것처럼 광해군 때부터 남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남단은 한강 가 청파역 옆의 소나무 숲속에 있었는데, 풍(風)·운(雲)·뇌(雷)·우(雨)·산천(山川)·성황(城隍)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남단은 남방토룡단(南方土龍壇)이라고도 하고, 5방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내던 곳이다. 기우제를 열한 번 지내도 비가 오지 아니할 때 열두 번째로 지내는 기우제가 5방토룡제인데, 정3품으로 제관을 삼고 흙으로 용(龍)을 만들어 동서남북 중앙의 노상(路上)에 놓고 채찍질해 기우제를 지냈다.
아주 오래전 백제에서도 남단에 제사를 지냈으니,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백제 다루왕 2년(AD 29) 봄 정월에 백제왕이 동명왕묘를 알현하고, 2월에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였다.” 하고, “고이왕 14년(AD 247) 봄 정월에도 왕이 동명묘를 참배하고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남한산성 내 호국 사찰은 한말에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1883년 4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였던 박영효가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사관 신복모 등을 중심으로 해 남한산성에 1천여 명의 신식 군대를 양성하고자 했으나, 당시 집권세력이 박영효를 면직시킴에 따라 무산됐다. 이어서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전국적인 의병전쟁이 전개되면서 남한산성에는 김하락, 심진원 등 의병 1천600명이 집결해 국권회복의 전진기지가 됐다. 이때 성 안에는 식량과 각종 대포, 조총, 탄환, 철환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제는 1907년 8월 1일 조선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조선 군대 소유의 무기를 회수했는데, 남한산성의 무기는 의병들에게 점거될 것을 우려해 회수보다는 폭파의 방법을 선택했다. 이 때 9곳 사찰의 무기가 폭발하면서 천지가 진동했고, 이로써 호국 사찰은 잿더미가 됐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11편에서는 ‘성남역사의 뿌리’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