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까치 2009. 5. 26. 15:50

 

(8) 연무관(演武館)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6호(1972년 5월 4일 지정)
  소 재 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0-1
  크    기  정면 5칸, 측면 3칸
  면    적  건평 122.1㎡

 


  1624년(인조2)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남한산성 동편 산 기슭에 연무관(演武館)이 건립됐다. 남한산성에 주둔한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서 그 가운데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한양으로 보냈다.

처음에 ‘연무당(演武堂)’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수어사 김재호(金在好)에게 개수하도록 명하고 ‘연병관(鍊兵館)’이라 쓴 편액을 내렸다고 월탄 박종화의 남한산성 기행문에 적혀 있으나, 다른 문헌에서 김재호라는 수어사는 찾아볼 길이 없어서 월탄이 어떤 문헌을 보고 그렇게 밝혔는지 알 수 없다. 정조 때는 ‘수어영’이라 개칭했으나, 그 뒤에도 보통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불렀다.

   
 

 

 # 원기둥에 주련 4개 걸어

연무관 건물의 특징적인 부분은 전면 기둥을 원기둥으로 세우고, 4개의 주련(主聯)을 걸어놓았는데, 통나무에 글을 쓰고 그 안쪽을 파내어 기둥을 감싸듯이 부착했으니, 마치 주련이 기둥을 보호하는 갑옷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련에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는데, 매우 심오한 뜻을 담고 있어 사람들마다 뜻풀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玉壘金城萬仞山(옥루금성만인산) 
 風雲龍虎生奇力(풍운용호생기력)
 角羽宮商動界林(각우궁상동계림)
 密傳葱本空三本(밀전총본공삼본)

주련 글귀의 뜻을 풀이하는 데에는 연무관이 무술 연마와 군사조련을 행했던 곳이었던 점을 감안해 군사적 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 길 높은 산에 옥처럼 단단한 보루와 철벽같은 산성 / 바람과 구름, 용과 호랑이 기이한 힘을 발한다. / 각우궁상 음악소리 계림(界林: 이곳 연무관)에 진동하고, / 은밀히 파뿌리를 전하자 삼본(三本)이 텅 비었네.”


군사를 조련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깃발과 음악이 사용되고, 특수한 비밀지령을 사용하게 된다. 군사작전의 여러 진법 가운데에는 8진(8陣)이 있어 천(天), 지(地), 풍(風), 운(雲), 용(龍), 호(虎), 오(鳥), 사(蛇)의 8가지를 기묘하게 운용해 무궁한 변화를 꾀하고, 대개 깃발에도 이러한 것을 상징하는 그림이 사용됐다. 그리고 진군이나 후퇴, 이 모든 것이 음악소리에 의한다. 철벽같은 산성 안 연무관에는 깃발이 나부끼는 가운데 8진법을 비롯한 다양한 진법이 펼쳐지고, 각종 명령이 악기를 사용한 음악 신호에 의해 전달된다. 그리고 몰래 파뿌리를 전하자 3개의 군영이 일시에 자취를 숨기는 상황이 연출된 것을 보고 지은 것이 아닐까?

 

 

 

 

 

 

 

<승정원일기> 고종 4년(1867) 9월 11일에 임금이 남장대에 친림한 뒤 연무관으로 가서 야간 훈련을 거행한 내용에는 횃불을 비롯한 깃발, 각종 악기, 대포 등의 여러 가지 신호를 사용해 군사훈련을 실시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신호 가운데 비밀리에 장군이 은밀하게 전하는 내용물에 따라 군대의 움직임을 약속하고 그것대로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는 기록이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전해온다.

“또한 비밀의 명령 같은 것이 있어서, 나뭇가지(木枝)를 비밀리에 전하면 一軍이 모두 멈추고, 비밀리에 돌덩어리(石塊)를 전하면 一軍이 모두 앉으니, 이와 같은 종류이다. 반드시 항상 사법(死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장이 여러 장교들과 약속해 말하기를, 비밀히 계란을 전하면 둥근 진(圓陣)으로 변하여 만들고, 네모난 판자(方版)를 전하면 네모난 진(方陣)으로 변하여 만든다. 비밀히 파뿌리를 전하면 곧, 에워싸서 셋으로 둘러싸니 이와 같은 종류이다. 오로지 임시변통으로 하는 것이니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이처럼 어떤 물건의 형태에 따라서 사전에 약속된 진법을 구사하는 훈련방법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고, 그 중에는 파뿌리도 암호 전달의 한 가지 도구로 활용됐던 것이다.

 

 

 # 임금이 백성과 직접 만나는 장소로도 활용

   
 

연무관은 겨울에 광주부윤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고, 군사훈련의 장소일 뿐 아니라, 임금이 백성들과 직접 만나 민원을 해결해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효종대왕의 60주기(週忌)가 되는 1779년에 여주에 있는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참배하러 오가면서 남한산성에 들렀던 기해주필 때, 정조대왕은 산성에 머무르는 동안 거의 매일 연무관에 들렀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는 한편으로, 남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승군의 폐단에 대한 시정조치 등을 했다.
8월 7일에는 수어사·경기감사·광주부윤이 백성을 거느리고 명을 받고 나아가니, 승지 이병모(李秉模)를 시켜 백성을 위로하는 글을 읽게 하고, 또 이병모를 시켜 하유하기를 “나 과인(寡人)은 너희들의 부모가 되어 혜택이 아래까지 미치기에 부족하여 너희들이 늘 굶주림과 추위에 괴로운 걱정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궁궐이 비록 깊숙하다고는 하나 늘 너희들이 떠돌며 몹시 괴로운 정상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 비단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하지 않을 뿐이겠는가? 매양 나도 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 편치 않다. 이번에 먼 능(陵 : 여주의 효종 영릉)에 다녀오면서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정례(情禮)를 조금 폈는데, 연(輦 : 임금이 타는 가마)이 지나는 길에서 너희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모여들어 길에 가득차서 모두 기뻐하는 빛이 있으니, 내 마음도 기쁘다. … 산성 백성의 노고는 다른 곳보다 더욱이 심하거니와 무릇, 너희들의 근심되고 고생되는 단서를 모름지기 내 앞에서 모두 아뢰어야 한다. 내가 묘당(廟堂)의 신하와 수령으로 하여금 바로 잡고 고칠 방도를 강구하게 하겠다.”했다.

   
 

또, 다음 날인 8월 8일에는 연병관에서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시험해 문과에 민태혁(閔台爀) 등 3인을 뽑고 무과에 이상연(李尙淵) 등 15인을 뽑았는데, 이 때 문과에 응시한 선비가 800명이 넘었고 무과에 응시한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날 임금의 복장은 융복(戎服 : 군복)을 갖추었고, 과거 시험의 주제는 ‘在德不險 ; 덕에 달려 있지 험준한 데 달려 있지 않다’로 삼았다.
임금이 수어사 서명응에게 “남한산성은 국가에서 급할 때에 믿는 곳이다”하고, 승군의 좌작진퇴(坐作進退)하는 방법도 직접 시열(試閱)했는데, 승군들이 방진(方陣)·원진(圓陣)을 법식대로 벌여 이루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련(操鍊)하지 않은 군사가 오히려 절제(節制)를 아니, 가상하다”고 칭찬했다.
한편 근년 이래로 이미 조련에 부지런하지 않거니와 또 노역(勞役)을 돌보지 않아서 점점 이산(離散)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는 데 대해 “단결(團結)하여 군사를 만드는 것이 급할 때의 도움이 될 뿐이 아니라 다 같은 내 백성이므로 구제할 방도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8월 9일에는 임금이 황금으로 장식한 갑옷을 입고 서장대에서 군사들의 주야간 훈련을 점검하고 산성의 여러 곳을 차례로 순시한 후 연무관에 들러 산성 안 백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폐단이었던 보휼고(保恤庫)의 빚을 탕척해 주었다.
서명응이 아뢰기를 “당초 빚을 준 것은 비록 이자를 받아 보태어 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제는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본전은 이미 다 갚았는데 이자는 오히려 남아 있어서 이웃에서 거두고 겨레붙이에게서 거두기까지 하므로 온 경내(境內)가 술렁거립니다. 장교(將校)·서리(胥吏)로부터 아래로 군졸·평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이 폐단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모두 탕척해 주기로 결심하고 말하기를, “숙묘(肅廟:숙종)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어찌 아까우랴?’하셨고, … 무릇 백성을 편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어찌 피부가 아깝지 않을 뿐이겠는가? 국용(國用)이 줄어지는 것은 돌볼 것도 못 된다.”하고, “성 안 백성의 빚돈을 탕척하고 문권(文券)을 불사르라.”해 빚돈 4천 냥을 탕척해 주었다.

이때 수어청 교련관이 당초에 빚을 내줄 때부터 20년 동안 쌓인 보휼고의 채무 문서를 연병관 뜰 아래 가져다 놓으니, 임금이 “문권이 어찌 그리 많은가?”하고 이를 모두 불사르게 했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우리 임금의 은덕(恩德)이 하늘처럼 끝이 없습니다.”고 했다.
정조대왕이 남한산성에 마지막으로 머무르던 날, 8월 10일에는 연병관(鍊兵館)에 나아가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9편에서는 현절사와 삼학사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