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역사... 남한산성<기호일보 연재>

(4)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성남까치 2009. 4. 28. 15:07

 

(4)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한춘섭 광주문화권협의회장 겸 성남문화원장

 

 

지정번호 :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
지정연도 : 1972년 5월 4일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시    대 : 조선 후기
면    적 :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497.9m) 정상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한산성에 설치됐던 장대(將臺) 중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장대는 군사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것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설치했는데, 이 가운데 수어장대는 가장 넓은 시야가 열린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남한산성 전체의 군사 통솔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층층 봉우리에 겹겹돌로 쌓은 한남성이여 / 層巒疊石漢南城
서장대 높직하니 군사를 주둔시킬 만하네 / 西將臺高可按兵
삼전도에 완악한 빗돌 서 있는 걸 보게나 / 請看三田頑石立
당시에 진평 같은 기묘한 계책 없었던 게 부끄럽구려 / 當時奇計媿陳平
                 (정조대왕)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농성을 할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申景진<示변에 眞>)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동장대는 동문 안에 있었는데 좌부별장 여주목사의 신지(信地:병영)가 있었고, 후영장 죽산부사의 신지는 그 바깥의 5리쯤에 있었다. 그 동쪽으로 봉암성이 위치한다.

   
 


서장대는 우부별장 이천부사의 신지다. 남장대는 남문 안에 있으며, 전영장 광주판관의 신지다. 밖으로 옹성이 두 개 있다. 1788년(정조12)에 부윤 이태영이 대(臺) 위에 누각을 세웠는데 건축은 서장대와 같이 했으며, 편액은 타운루(唾雲樓)라고 했다. 북장대는 북문 안에 세웠는데 중영장 양주목사의 신지다.
이들 네 곳의 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현재 남아 있다. 성안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고 옆에는 기우제단이 있었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부르던 것을 1751년(영조27)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대 위에 누각을 증축해 2층으로 만들어 상루와 하대가 훨훨 나는 듯한 위용을 자랑하게 됐다.

2층 누각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수어장대의 앞마당 왼쪽에 있는 바위에는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긴 글씨가 뚜렷하게 현존하고 있다.

수어장대의 아래층은 정면 5칸, 옆면 3칸, 위층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2층은 1층 오른쪽 뒷 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2층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숙종임금의 장인 김만기(金萬基)는 <西將臺記>에서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는 말로 병자년의 참상을 전해주면서 다시 또 쓰기를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라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침을 가해 경계했다.
무망루는 곧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정벌하려던 계획을 추진하던 중 실천에 옮기기 전에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러한 내용이 조선 후기에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삽교(霅橋) 안석경(安錫儆, ?~1782)의 <삽교집(霅橋集)>에 <무망루기(無忘樓記)>로 전해온다. 안석경은 유능한 사람이 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때 특별히 채용하는 유일(遺逸)로 천거돼 영조임금 때 참봉이 된 사람이다. <무망루기>에는 그 이름의 유래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때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 청나라와의 관계,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자고 주장했던 삼학사들 이야기와 병자호란의 치욕, 그리고 그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준비했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병자호란 후 조선이 국운을 다하는 고종임금 때까지 역대 임금들은 이곳 서장대에 와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특히 남한산성의 경우에는 동서남북 네 곳의 장대가 있는데 중간에 있어야 할 중장대(中將臺)는 애초에 설치하지 않아 서장대가 그 중심역할을 함께 맡고 있었다.
정조대왕은 즉위 3년 되는 해인 기해(1779)년에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남한산성에 들렀다. 이때 정조대왕은 광주지역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을 배설하기도 했고, 남한산성의 곳곳을 다니면서 신하들에게 병자호란 때의 상황을 조목조목 질문을 던졌다.

서장대에서 군사 조련을 할 때 정조대왕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동서남북에 다 장대가 있는데 중장대(中將臺)라는 명칭만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성 안의 지형이 가운데는 오목하고 사방이 높아서 그런 것인가?” 하니, 송환억이 아뢰기를 “중장대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지형이 그렇기 때문입니다.”했다.

조선 후기의 군사제도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금위영(禁衛營), 수어청(守禦廳) 등으로 구성된 5군영(軍營) 체제였는데 이 중 수어청은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중앙군영이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가 관할했으나 병자호란 이후부터 군영으로 독립해 수어사(守禦使)를 두었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본청을 두고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을 부사로 임명해 운영하다가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1795년(정조19)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했던 중요한 군사 지휘소 역할을 했다.

수어청에는 전·우·중·좌·후의 5영(營)이 있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 중영장은 북장대, 후·좌영장은 동장대 그리고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돼 휘하의 장졸들을 지휘했다.

이처럼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남한산성 서장대는 남한산성 내의 중심 지휘소로서의 수어청 지휘소가 설치돼 ‘수어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됐다.

 

 # 역대 임금들이 서장대에 와서 남긴 어록

 

“내가 오늘 이곳에 와서 지나간 일을 추상(追想)하니, 저절로 서글픈 감회가 일어난다.” <숙종대왕>

 

대낮 교장에서 군사훈련을 보고나니
해질 녘 날씨는 비 온 뒤라 한결 맑구나.
불빛이 성가퀴를 연하여 밝히니
바로 서장대에서 북과 피리 소리 울리는구나
험준한 곳에 성을 쌓으니 하늘의 조화인가?
검각(劍閣)의 깊고 험함이 이와 같겠느냐.
전일 내가 오를 적에는 강개함이 많더니
옛 생각에 잠기니 눈물짐을 깨닫지 못하네.  <숙종대왕 35년(1709) 시>

 

말 멍에 돌려 서장대에 올라
군신이 지난 일 말하는데 어두워 오네
홀연히 강개함을 누르지 못하니
오직 좋은 이음만이 있도다.                <영조대왕>

 

“내가 잠저(潛邸) 때부터 황조(皇祖)께서 존왕(尊王)하신 의리와 성고(聖考)께서 계술(繼述)하신 뜻을 항상 추모하여 왔는데, 이 대에 올라보니 나도 모르게 비감(悲感)해진다. 그러나 추모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황조의 의리와 성고의 뜻을 계술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크게 추모하는 것이 된다.”  <정조대왕 즉위년>

 

“병자년·정축년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인심은 편안한 데에 익숙하면 직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습성을 이루게 된다. 효종(孝宗)께서 성취하지 못하신 뜻을 우러러 생각하면 강개(慷慨)한 마음이 격앙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정조대왕>

 

“선대왕(先大王) 경술년 행행(行幸) 때에 이 대(臺)에 들르셨고 오늘 내가 또 여기에 왔는데 산천이 옛날과 다름없어 사물에 접하면 감회를 일으키니, 내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슬프고 사모하게 된다. 병자년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 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  <정조 3년 기해년(1779)>
 
“세월이 흘러가니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 안일에 젖어 의리를 잊어버리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군신 상하가 함께 노력하고 권면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능침에 전배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서 효종 임금께서 미처 이루지 못하신 일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북바쳐서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철종 4년>

 

<※ 다음 주 “큰 역사의 숨소리가 있는 남한산성” 5편에서는 수어장대 바로 옆에 위치한 ‘청량당(淸凉堂)과 매바위’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