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생활

우리나라 전통 형벌제도에 대해....news-pro 2월호 게재

성남까치 2009. 2. 9. 09:19

우리나라의 전통 형벌 제도에 대하여
  
News-Pros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대검찰청 기록연구사 이현정 입니다.
지난달에는 조선시대 이혼제도에 대해 설명했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역사와 법, 그 열한 번째 시간으로 우리나라 전통 형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형벌 제도는 다른 제도와 비슷하게 중국의 형벌 제도를 참고하여 실시되었습니다. 한(漢)나라 이전부터 고대 중국에는 묵형(墨刑), 의형(?刑), 월형(?刑), 궁형(宮刑), 대벽(大?) 등 다섯 가지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이 중 묵형은 먹으로 죄명을 문신하는 형벌이며, 의형은 코를 베는 형벌이고, 월형은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형벌이며, 궁형은 남성의 성기를 잘라내는 형벌이었고, 마지막으로 대벽은 사형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형벌은 원래 죄인의 범죄 유형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즉 성범죄를 저지르면 궁형을 행하였고, 음식을 훔친 경우에는 입에 형벌을 가할 수 없으므로 음식 냄새를 맡는 코를 벤 것이고, 도망간 범죄자를 잡았을 경우에는 발뒤꿈치를 잘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라 때 흉노족에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받게 된 사마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범죄 유형과 형벌의 직접적 연관성은 점차 약해지고, 위정자의 판단에 따라 형벌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어떠한 형벌이 행해졌을까요?
일단 한국에서는 고대 중국보다는 형벌이 가혹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궁형은 전혀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의형이나 월형, 두 귀를 베는 이형도 악독한 상전이 노비에게 가한 경우는 있지만, 국법으로 시행된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묵형과 사형은 실시되었습니다. 먼저 묵형은 주로 도둑질한 자를 잡았을 경우 얼굴 또는 팔뚝에 ‘절도’, ‘강도’ 등의 글자를 문신하였습니다. 이를 자자(刺字) 또는 경형(?刑)이라고도 했는데, 우리가 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인 ‘경을 칠 놈’이라고 할 때 바로 이 경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 말의 뜻이 좀 무시무시하네요.
어쨌든 비교적 후대인 조선 시대에도 묵형은 간간히 시행되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참조하여 절도를 저지르면 초범은 오른쪽 팔뚝에 ‘절도(竊盜)’ 두 글자를 새기고, 재범은 왼쪽 팔뚝에 새기며, 삼범은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사면령을 내려 삼범 이상의 경우에도 교수형에 처하지 않고 목 뒤나 빰에 글자를 새기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묵형, 즉 자자는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형벌이었을까요?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묵형은 몸에 글씨를 새겨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기본 자료로 삼으려는 의도와 함께, 사람들에게 수치심이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범죄를 미리 예방하려는 효과도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양쪽 팔뚝이나 목 뒤에 글씨를 새겨서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아 도적들이 또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빈번해지자, 그 대책으로 정부에서는 도둑질한 액수가 크거나 도적집단의 우두머리에게는 초범이라도 뺨에 문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자형은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쓰여진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며, 18세기 숙종 때까지도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만, 사람의 신체에 문신을 평생 새기는 일은 너무 가혹한 것이라 하여 1740년 영조의 어명으로 완전히 폐지되었고 이때 문신 도구들도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고대의 형벌 제도들 대신 중국의 수·당 시대에 새로 제정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을 새로운 오형제도로 채택하여 주로 시행하였습니다.
우선 태형과 장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태형은 10대부터 50대까지, 장형은 60대부터 100대까지 각각 5등급으로 나누어서 남자의 경우 죄인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볼기를 치게 하였고, 여자의 경우에는 홑옷을 입힌 채로 형을 집행하되 종종 엉덩이에 물을 끼얹어 물볼기를 치는 형벌이었습니다. 원래 태형은 등을 치는 태배(笞背)로 실시되었는데, 오장(五臟)이 모여 있는 등을 쳤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볼기나 다리를 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형이나 장형에 쓰이는 매는 대체로 길이 약 1.1미터에 매 치는 부분 지름은 태의 경우 8mm, 장의 경우 1cm 정도였다고 하니, 몽둥이보다는 가늘고 회초리보다는 굵은 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죄인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면 ‘매우(맵게) 치라’는 관장(官長)의 소리에 따라 집장사령(執杖使令)이 매를 치는데, 이때 주위에 둘러선 다른 관속이 활처럼 생긴 산판(算板)의 나뭇조각을 하나하나 옮기거나, 또는 종이에 숫자를 적거나, 아니면 여러 관속들이 한꺼번에 합창을 하며 매 수를 세었습니다. 그리고 매를 칠 때에는 죄인이 요동치지 못하게 가죽끈으로 죄인의 손목, 발목, 허리를 묶었으며, 매를 맞는 도중 죄인이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사흘 정도 후에 다시 때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를 맞을 경우에도 신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형불상대부(刑不上大夫)’, 즉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는 전통적 법사상에 따라 사대부의 경우 그가 데리고 있던 노비가 대신 맞거나 한 대당 얼마씩 오늘날의 벌금에 해당하는 속전(贖錢)을 받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나 조선의 신분제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매를 때리는 형벌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즉 일제에 의해 1910년 제정된 범죄즉결령(犯罪卽決令)에서는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이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태형을 즉결처분할 수 있게 하였으며, 1912년에는 조선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구실 하에 정식으로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을 제정하여 조선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태형을 집행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의 매는 아주 혹독해서 대개 한번 맞으면 혼자 걸어 나오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축 하에 실려 나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런 형벌을 조선 사람에게만 실시했다는 것은 참으로 비인도적이요, 민족차별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곤장(棍杖)과 장은 아주 다른 것임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즉 배의 노처럼 길고 끝이 넓적한 나무로 때리는 곤장은 장과는 다른 것으로서, 원래 ‘곤(棍)’이라고 하였습니다. 곤은 가볍고 탄력성 있는 버드나무로 만드는데, 이는 조선후기에 등장하였고, 군대에서 군법을 집행하거나 토포영(討捕營)에서 도적을 다스릴 때에 한해 사용된 형벌 도구였습니다. 일종의 특수목적용 도구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곤장은 관찰사, 병사, 수사, 토포사나 변방 지역의 수령들만 사용할 수 있었고 일반 고을 수령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한 번에 30대 이상은 치지 못하게 규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러한 법조문이 무시되어 일반 백성들을 때리는 데 사용되거나, 버드나무보다 강력한 참나무나 박달나무를 써서 만들거나, 또는 한번에 30대 이상을 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곤은 그 크기와 길이에 따라 소곤(小棍), 중곤(中棍), 대곤(大棍), 그리고 죽을죄를 저지른 자를 다스리는데 썼던 중곤(重棍), 그리고 도둑을 다스리는데 사용한 치도곤(治盜棍)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 곤장형은 태형이나 장형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고통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한말 외국인의 견문기를 보면 불과 몇 대에 살갗이 검푸르게 변하고 피가 맺히더니, 10여 대에 이르자 피가 땅바닥에 흐르고 곤장에 살점이 묻어나기 시작하여 급기야 죄인이 기절하더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자료는 곤장형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히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태, 장과 곤장의 규격 : 1778년 ‘흠휼전칙’>

<태, 장과 곤장의 규격 : 1778년 ‘흠휼전칙’>


다음으로 도형(徒刑)은 죄인을 중노동에 종사시키던 형벌이었습니다. 이 도형에는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의 다섯 등급이 있었으며, 도형을 당하게 되면 관청에 소속되어 소금을 굽거나 쇠를 불리는 등의 힘든 일을 수시로 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죄인들이 이를 피하려 하였는데, 만약 도형을 감하려면 징역 1년에 대해 장 60대를 맞아야 했으며, 한 등급마다 10대씩 증가시켜 맞아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도형은 오늘날의 징역살이에다가 힘든 강제 노역을 추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유형(流刑)이란 중죄를 범한 자에게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멀리 추방하여 종신토록 귀환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말합니다. 유배는 주로 모반이나 반란을 꾀한 자, 정부 정책을 비판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자, 권력 다툼에 밀려난 자 등 주로 정치적 사건에 관련된 관리들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배는 중앙 정치무대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각종 정치참여나 사회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국왕이 있는 한양과 유배지와의 거리는 물론이고, 유배지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 유배지가 내륙이냐 섬이냐 등에 따라 각각 단계와 차별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형은 대개 살인자에게 가해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워낙 특별한 중죄인의 경우에는 ‘부대시(不待時)’라고 하여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했지만, 일반적인 죄인들은 추분부터 춘분까지만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봄과 여름에는 만물이 소생하여 성장하는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의 순리에 맞추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형에는 목을 매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그리고 능지처사(陵遲處死),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교형은 신체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여성들이나 노약자, 관리 등을 대상으로 시행된, 참형보다는 한 등급 가벼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교형이 사람들이 직접 죄인의 목에 줄을 걸고 이를 양쪽에서 잡아 당겨서 목을 졸라 죽였던 데 비해, 우리나라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고 대부분 그저 죄인의 목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대의 교형 : ‘금산현보갑장정’>

<청대의 교형 : ‘금산현보갑장정’>


참형은 주로 조선시대 도적이나 역적과 같은 무거운 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사형 제도로서,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사형 방법을 말합니다. 만일 지체가 높거나 권위 있는 집안의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대부분 참형보다는 사약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약을 내렸던 이유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비록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부모님이 주신 신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체 높은 신분의 사형수에 대한 정부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수형의 경우 망나니들은 큰 칼로서 죄인의 목을 치는데, 죄인을 앉혀 놓고 목을 치면 목이 제대로 베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을 형틀에 묶고 땅에 엎드려 놓고서 나무 목침 위에 사형수의 목 앞부분을 걸쳐 몸을 고정시킨 후 망나니가 칼을 아래로 내려치는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능지처사는 교형이나 참형보다 더욱 잔혹한 사형이었습니다. 능지처사는 대개 주인을 살해한 노비나, 부모, 조부모 등 가까운 혈족 어른을 죽인 패륜아나, 일가족 3인이상을 죽인 흉악범이나, 대역죄를 범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가해지는 극형이었습니다. ‘능지(陵遲)’란 글자 그대로 완만한 언덕을 오르내리듯이 서서히, 그리고 고통을 최대한 느끼도록 산 채로 온몸을 도막내어 죽이는 것입니다. 능지처사는 대개 팔다리,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이는 방식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참형 : 김윤보 ‘형정도첩’>    <청대의 능지처사 : ‘금산현보갑장정’>


<참형 : 김윤보 ‘형정도첩’>                   <청대의 능지처사 : ‘금산현보갑장정’>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주로 중국에서 거행되었고, 조선에서는 대개 환형(?刑), 즉 죄인의 팔다리, 그리고 목에 다섯 개의 줄을 매달은 상태에서 다섯 마리 소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서 결국 죄인의 팔다리와 목을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이 주로 실시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대역죄인이 취조 중 죽은 경우에도 그 시신을 거열하였는데, 이를 ‘육시(戮屍)’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다 사형당한 사육신들은 취조 중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거열형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참형이나 교형이 도성 밖에서 진행되었는데 비해 거열형은 많은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적이 많은 도성 안 저자거리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더욱이 역모죄의 경우에는 관료들로 하여금 형장에 둘러서서 구경하도록 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참수형이나 능지처사와 같은 우리나라의 사형제도는 그 자체로서도 매우 끔직한 사형제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근대 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 을미개혁 때 칙령이 반포되어 참수형과 능지처사는 사라지고, 민간인의 교수형과 군인의 총살형만을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우리나라의 형벌 제도는 중국 제도를 많이 따랐지만 실제 시행에 있어서는 중국보다는 한층 온건한 방법으로 시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벌 제도의 변천사를 보더라도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주어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는 방법보다는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 생명을 중시하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재범을 방지하려는 방향으로 진보해왔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전통 형벌 제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시대 성범죄와 그 처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